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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주시 관광자원 영상이미지

하늘도 감동한 손순(孫順)의 효성

| 2005.01.27 | 조회 1847

경상북도 월성군 현곡면 남사동(月城郡 見谷面 南莎洞)에 속칭「북골」이라고 부르는 부락이 있다.

「북골」이란 대효 손수의 효성이 하늘에 통해 석종(石鐘)의 기적을 나타낸데서 나온 이름이다.

지금 그 동리의 중앙에 수백년의 연륜을 자랑하는 고목들이 있는 숲이 있고 그 가운데에 손순의 유허지가 있다.

여기에는 조선시대 말기의 학자이며 벼슬이 이조판사에 이른 허전(許傳)이 찬술한 비문이 적힌 비석이 있었으나 근래에 와서 파괴되고 말았다.
손순의 유허지는 효성을 길이 전하기 위해서 건립된 홍효사(弘孝寺)의 옛터이기도 하다.
손순은 홍덕왕때의 사람이며 아버지는 학산(鶴山), 어머니는 운오(運烏)라고 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는데 정성을 다했다. 그러나 너무나 어려운 살림살이가 되어 품팔이도 하고 산에 가서 나무도 하고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일을 해서 근근히 그날 그늘의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이런 형편이라서 어머니를 봉양하는데도 어려움이 많았다. 이러한 가난한 가운데도 손순 부부의 마음은 어머님의 봉양에만 힘썼다.

두 사람은 끼니를 거르는 한이 있어도 어머니에게 맛있는 음식을 올리고 가난해서 밥도 때로는 못먹는다는 표를 내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두 부부에는 어린 아들이 하나 있었는 매양 노모의 음식을 먹어 버리는 것이었다. 철이 없는 어린 것이라서 타일러도 알지를 못한다.
거기에다 노모도 손자가 귀여워서 몰래 드린 음식까지도 손자에게 줘 버리고는 배고픈것까지도 참는 것이었다. 이런 사실을 안 순은 일대결심을 하고 아내에게 상의 했다.
"아이는 다시 얻을수가 있지마는 어머니는 한번 가시며 다시는 그만이 아니오. 아이가 철없이 매양 저모양이니 어머님의 굶주림이 얼마나 심하겠소. 아무리 생각해도 별 도리가 없으니 방법은 단 하나 밖에는 없을 것 같소. 아이를 묻어 버립시다. 그리고 어머님을 배부르게 하는 것 이것이 우선 효성의 첫째가 아니겠소!"
그의 아내도 "어머니를 배고프게 하고 어찌 사람의 도리를 할수 있겠습니까? 자식을 버리는 한 이 있어도 지금의 우리 처지로서는 하는 수가 없지요."하고 남편의 제의를 받아 드렸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마음이란 동서고금을 통해서 다를 바가 없다. 더우리 하나뿐인 자식이 아닌가! 그런데도 "자식은 다시 낳을 수가 있지마는 어머님은 한번 가시면 그만이 아니냐"는 그 마음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두 사람은 아이를 묻어 버리기 위해 어머니 몰래 집을 나섰다. 아내는 무심히 잠든 아들을 등에다 업고 남편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흐르는 눈물을 삼키느라고 말도 한마디 걸낼 수가 없었다.
묵묵히 걸어가는 두 사람의 모습... 이것은 그대로가 성인(聖人)이었다.
두 사람은 취산(醉山) 북쪽의 들로 가서 아기를 묻기 위한 구덩이를 팠다.

자칫하면 자신의 발을 찍을 정도로 눈물로 앞이 흐려지는 것을 참으면서 팽이를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이를 묻기 위한 구덩이 속에 돌로 만들어진 종이 묻혀 있는 것이 아닌가? 두사람은 놀랍고 신기해서 석종을 숲의 나무 가지에 걸어놓고 두드려 보았다. 그랬더니 더욱 놀랍게도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 같은 아름다운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나와서는 온 들판 위를 퍼져나가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뜻하지 않는 이 석종의 발견과 그 묘한 소리에 넋을 잃은 사람처럼 서로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만에
아내가 입을 열었다.
"이 신기한 물건을 얻은 것은 이 아기의 복인가 싶습니다. 아이를 묻지 말고 돌아갑니다."
손순도 그러리라고 생각되어 아이를 업고 집으로 왔다.
그들은 돌종을 집에다 달아놓고 두드렸다. 그 묘한 소리는 들을 넘고 강을 건너 대궐 깊은 곳 까지 흘러갔다. 당시의 임금님 홍덕왕도 그 종소리를 들었는데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이상한 종소리다. 왕은 신하들에게 명령했다. "서쪽의 교외에서 이상한 종소리가 들려오는데 호소하듯한 묘한 소리가 심상하지 않구나, 빨리 알아오도록 해라!"
임금의 사자는 소리나는 곳을 찾아 순의 집에 이르러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신하로부터 보고 받은 왕은 감격했다.
"옛날에 한(漢)나라의 곽거(郭巨)가 아들을 묻다가 금솥을 얻었는데 이제 손순은 돌종을 얻었으니 지극한 효성을 하늘이 살핀 것이리라. 하늘도 효자를 살펴 석종을 내렸는데 과인이 어찌 그냥 있을 수 있겠는가? 효자 순에게 집 한 채를 주고 해마다 쌀 50석을 내려 편히 노모를 봉양토록 하라"고 영을 내렸다.
이래서 손순의 효성은 온 나라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후에 손순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나라에서 얻은 집을 절로 삼고 석종을 달아두고 자식된 자가 그 도리를 다 할 것을 기원하게 했다.
이래서 그 절 이름도 홍효사(弘孝寺)라고 했던 것이다.
진성여왕때에 후백제의 흉악한 도적의 무리가 이 마을을 습격해서 석종을 도둑질해 갔다고 한다. 후백제와의 전란때 없어졌다면 진성여왕때가 아니고 경애왕을 잘못 전했을 것이며 서울이 수라장이 되고 도적의 무리가 판을 쳤으니 보물로 이름이 높은 물건이 그냥 남아 있을 수가 없다. 그 후 다시 절마저 없어지고 지명만이 종동(鐘洞)이니 「북골」이니 하고 남아 있을 뿐이다. 설사 석종이 없어지고 홍효사랑 절도 없어졌다고 하더라도 하늘도 감동한 그 효성만은 길이 남아 만인의 가슴 속에 꽃피우기를 우리 모두 기원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