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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주시 관광자원 영상이미지

귀신도 울었다. 3대의 충절

| 2005.01.27 | 조회 2003

김흠춘, 반굴, 영윤 3대의 충성 -
김흠춘(金歆春)은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며, 진평왕때에 화랑이 되었다. 어질고 도덕이 높았을 뿐 아니라 신의가 두터워서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3국이 통일되는 어려운 시대를 맞아 때로는 전선에서 목숨을 바쳐 싸웠으며 때로는 조정에서 임금을 보필하여 통일의 대업을 이루는데 이바지한 공이 누구에게도 뒤떨어지지 않았다.
문무왕 때에는 재상에 올랐는데 위로는 임금을 섬기는데 충성을 다했고, 아래로 백성을 다스리는데는 어머이와 같은 마음으로 대했으므로 당대의 모든 사람들이 함결같이 우러러 보았다.

이렇게 충성으로 일관된 분이였는 까닭에 가정에서도 늘 나라를 위해서 몸바치는 것이 곧 효도의 으뜸이 된다는 것을 가르쳐 왔다.
태종 무열왕 7년(A.D 660)은 삼국 통일을 위한 대진군이 개시되어 백제를 병합한 해이다. 그 해의 7월 9일에 김유신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신라군은 물밀 듯이 국경을 돌파하고 황산(黃山)벌로 쳐들어 갔다. 그러나 여기에는 백제의 용장 계백( 伯)이 오천의 결사대를 이끌고 먼저 험한 지리를 이용하여 삼영을 설치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신라군은 단숨에 백제의 진영을 짓밟아버릴 기세로 돌진해갔다. 그러나 백제의 계백군은 너무나 용감했다. 양군은 4번 싸웠으나 싸움마다 신라군은 불리하여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기진맥진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장군 흠춘은 아들 반굴(盤屈)을 불렀다. 흠춘장군의 아들 반굴은 화랑들 가운데서도 용감하고 덕망이 높아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이였다.
아버지 장군의 부름을 받은 반굴은 흠춘 앞에 경건하게 무릎을 끓고 부친의 명령을 기다렸다. 씩씩한 자식이ㅡ 얼굴을 만족스럽게 바라보고 있던 흠춘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신하된 자의 도리는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이며, 자식된 도리는 효성을 다 하는데 있느니라. 지금 전세가 위급하고 사졸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으니 이때야 말로 목숨을 바쳐서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할 때이니라" 반굴은 부친의 말이 떨어지자 의기에 불타는 눈동자를 빛내면서 단호하게 한 마디 대답했다.
"삼가 아버님의 뜻을 실천하겠나이다"
반굴은 곧 적진으로 달려들어가서 힘이 다 할때까지 싸우다가 장렬한 죽음을 맞아 신하로서의 도리와 자식으로서 할 일을 다했다.
김영윤(金令胤)은 바로 이 용감한 화랑 반굴의 아들이며 명장이자 명재상인 흠춘의 손자이다. 그는 대를 이은 명문의 후예로 자라나 가문의 명예를 지키고 조부와 부친의 충성을 이어받고저 항상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다. 부친 반굴이 전사했을 때 아직 어린 아기에 지나지 않했던 그도 이제는 20세가 넘는 청년이 되었으니 부친과 조부의 빛나는 공훈을 사모하는 마음도 더 간절했던 것이다.
백제가 멸망되고 고구려 마져도 망한지가 10년이 훨씬 넘었다. 이 땅에 남아서 야망을 품고 있던 당나라 세력도 한반도 밖으로 물러갔으니 세상은 완전히 태평성대가 된 듯 했는데 뜻하지 않는 난리가 일어났다. 신문왕 4년(A.D 684)에 있었던 대문(大文)의 난이 이것이다.
앞서 구구려가 망한 직후 고구려의 독립운동을 벌린 세력 가운데서도 가장 유력한 한파가 보장왕의 외손인 안승(安 )을 중심으로한 세력인데 후에 신라에 귀속하였다.
신라에서는 안승을 「고구려왕」에 봉하고 고구려의 유민을 포섭하여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는 한 세력으로 삼았다. 문무왕 14년(A.D 674)에는 고구려왕 안승을 보덕왕(報德王)이라 하고 계속해서 금마저(金馬渚)에 있게 했다. 그러나 이미 당나라 세력까지 멀리 만주로 물러가고 신라의 근본정책이 중앙집권의 강화에 있게되자, 보덕국(報德國)의 존재도 말살시킬 필요성이 생겼다. 이래서 보덕국왕 안승을 신라의 귀족으로 삼아 소판(蘇判 : 제 3품위)을 내리고 성을 김(金)씨로 하여 서울에 머므르게 했던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고구려 유민의 반감을 사게 되어 드디어 안승의
족자( 子)인 대문이 반란을 꾀하게 된 것이나 사전에 발각되어 주살되고 말았다. 이렇게 되니 보덕국의 고구려 유민들이 신라의 관리를 죽이고 난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대문을 실복(悉伏)이라고도 하는데 이 난은 초기에는 세력이 상당히 강대했다. 조정에서는 즉시 군대를 파견하여 이들을 토벌하게했다. 영윤도 이 토벌군을 이끌고 실복의 잔당을 치게 된 것이다. 그는 황금서당(黃衿誓幢)이라는 고구려 유민들 가운데서 신라를 따르는 사람으로 구성되 중앙정부의 직속 군단 중 보병부대를 이끄는 보기감(步驥監)에 임명되었다.
출발에 앞서 영윤은 여러 사람들에게 그의 각오를 다지면서 말하기를,
"내가 이번에 출전하는 데는 온 문중과 그리고 함께 수련하던 친구들에게 추호의 부끄러움도 남기지 않으리라" 하고 결사의 뜻을 역력히 나타내었던 것이다.
신라의 토벌순은 실복의 일당들이 의지하고 있는 가잠성(假岑城)으로 진격하여 성의 남쪽 7리(里) 지점에서 진을 치고 정세를 살피면서 대기 상태에 들어갔다. 신라군은 작전회의를 열고 서로의
의견을 듣기로 했다. 그 중의 한 장수가 말하기를,
"지금 적의 동향을 비유해서 말한다면 마치 제비가 방에 갇혀 막(幕) 위에 깃들린 것 같고, 물고기가 잡혀서 솥안에서 노는 것과 같아서 운명이 이미 다한 것이니, 마지막 발악을 시도할 것이 분명하다. 옛말에도 궁지에 빠진 쥐가 고양이를 문다고 했으며 궁한 도적은 쫒지 말라고도 하였다. 그러니 지금 적을 공격하다가는 화를 당할 것이 분명하니 지금은 그대로 두었다가 피로가 극심한 때를 기다려 이를 친다면 칼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그들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 아닌가?" 하니 모든 장수들은 그 말이 옳다고 포위망을 풀고 물러섰다.
그러나 영윤만은 그 의견에 반대했다. 시일을 지체하는 것은 적에게 준비할 시간을 줄 뿐 아니라 고구려 유족들의 단결을 유도하는 결과가 되어 통일된 후 아직 얼마되지 않는 국내정세에 악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까지 미쳐 생각할 줄 모르는 그의 종자(從者)는 강력히 영윤의 속전속결 주장을 반대하여 말했다.
"지금 여러 장수들이 어찌 죽는 것을 싫어하고 무사하기만을 바래서 지연작전을 원한다고 할수 있겠습니까? 그분들의 생각이 그러한 것은 다만 기회를 엿보아 효과적인 방법을 강구하겠다는 것
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장군께서 홀로 곧 맞 싸우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영윤은 종자의 진언을 물리치면서 단호하게 대답했다.
"싸움에 임하여는 용맹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예경(禮經)에도 있는 바이며 직격만이 있고 물러섬이 없음은 화랑의 계율이거늘 구구한 이유를 찾아 싸움을 지연하는 것은 결코 신하된 자의 도리가 아니다. 그리고 장부가 큰일을 당해서는 스스로 결단을 내릴 일이지 어찌 남의 생각에만 따를 것이냐!"
영윤은 즉시 휘하의 군사를 격려하여 적군을 공격했다. 그는 부친과 조부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는 죽음의 장소가 바로 이 전쟁터임을 각오하고 있었다.
죽음을 각오한 영윤의 용전은 참으로 눈부신 바가 있었다. 그는 종횡으로 전선을 누비며 용전하다가 장렬한 전사를 했다. 그 옛날 황산벌의 격전터에서 그의 부친 반굴이 죽음으로써 승리의 길잡이가 되었듯이 영윤도 또한 목숨을 던짐으로 값진 희생을한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