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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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

출처 : 경주시 관광자원 영상이미지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검군(劍君)

| 2005.01.27 | 조회 2686
검군은 신라 진편왕 때 사람이다. 그 아버지의 이름은 구문(句文)이라고 했으며 관등은 대사(大舍)였다.
검군은 사량궁 사량궁(沙梁宮)의 사인(舍人)이라는 벼슬에 있었다. 성실한 젊은이였으며 의리를 존중하고 정의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대장부의 도리라고 항상 자기 자신에 타이르고 있었
다. 그의 이러한 마음가짐은 화랑의 낭도로서 자기 수양을 게을리 하지 않은 데서 얻어진 것이었다. 즉, 검군은 화랑인 근랑(近郞)의 낭도였던 것이다. 근랑은 이찬(伊 )인 대일(大日)의 아들이며
화랑이 되어 많은 낭도를 거느리고 신망이 두터웠다. 검군은 자기가 근랑의 낭도임을 자랑으로 여겨 화랑의 명예를 더럽힐까봐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터이였다.
그런데 진평왕 49년(627)에 심한 흉년이 들었다. 8월에 서리가 내리는 모진 냉해를 입어 온 들판의 곡식이 여물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래는 그런데로 어떻게 넘겼지마는 이듬해의 봄이 되고 여
름을 넘기는데의 고생은 이루 말할수가 없는 비참한 형편이었다.
나무 뿌리를 캐어 먹고 풀잎을 뜯어 먹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자식을 노예로 팔아 얼마간의 곡식을 마련할 정도였으니 그 참혹한 형편을 짐작할만 하다. 하급 관리들에 불과한 사냥꾼
의 사인들도 이러한 비참한 생활에는 변함이 없었다.
드디어 그들은 함께 모의하여 곡식을 간직해둔 창고를 열어 그것을 나누어 먹기로 했다. 그러나 검군은 이 곡식을 받지 않했다. 여러 사인들이 검군을 찾아가서 곡식을 받지 않는 까닭을 물었다.
"여러사인들이 다 곡식을 나눠 먹었는데 그대만 홀로 이것을 거절하다니 무슨 까닭이냐? 만약 곡식이 적어서 그렇다면 더 주겠네" 하고 행동을 같이 해 주기를 거듭 부탁했다. 그러나 검군은 "나
는 근랑의 낭도로서 화랑의 대열에 이름을 올린 사람이 아닌가. 그러니 의리에 어긋난다면 비록 천금의 이(利)가 있어도 거기에 따를 수는 없지 않는가 그렇다고 그대들의 일을 탓하지는 않겠으
니 나에게는 마음 쓸 필요가 없네" 하고 끝내 거절했다. 여러 사인들은 검군의 단호한 태도에 불안을 느꼈다.
"자! 이것 야단나지 않는가! 반드시 고발할 것이니 모두들 무슨 대책을 세우자꾸나"
사인들은 이마를 맞대고 수의한 끝에, "별 도리가 있을 수 있나? 검군을 죽이지 않으면 경국은 사실이 폭로되어 우리 모두들 화를 당할 것은 뻔하지 않는가!"이래서 그들은 검군을 죽일 것에 의견
을 모으고 검군을 대접하는 체 하고 그를 초청했다.
검군은 여러 사인들의 제안을 거절할 때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던 것이다. 검군은 사인들과 헤어지자 곧 화랑인 근랑을 만나러 갔다. 영원의 작별이니 인사라도 하고 떠나야겠다는 심정에서
였다. "화랑님 오늘 이후에는 다시는 만나 뵐올 수 없을 것 같아서 작별인사라도 드릴려고 찾아 왔읍니다." 근랑이 놀라서 그 까닭을 물었다. 검군은 사유를 밝히지 않고 다만 떠나기만 청했다. 더
욱 이상하게 여긴 근랑이 거듭 다구쳐 묻자 하는 수 없이 사실을 말하고 그들이 초청하는 이유를 말했다 듣고 있던 근랑은 하도 기가 차서 말했다.
"여보게 장군! 이것 무슨 어리석은 생각이냐! 그대를 죽일 모의를 했음을 알고도 죽기 위해서 그 자리에 가다니, 그런 어리것은 행동은 그만 두고 관청에 가서 당장 고발하도록 해야지" 하고 검군
을 그 자리에 못가게 했다. 그러나 검군은 말하기를. "그들은 오랫동안 함께 근무해온 친구들입니다. 내 하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그들을 고발하는 그런 의리에 어긋나는 짓만은 하고 싶지 않읍
니다."
"이것 참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 봤나. 정 그렇다면 도망이라도 가야 할 것 이 아니냐!"
"도망을 가다니요. 그럴 수는 없읍니다. 그들이 잘 못되고 저는 바른데 제가 도망을 간다면 옳고 그릇됨이 있을 수가 없읍니다. 죽음의 길을 택할망정 도망 갈 수는 없읍니다."
근랑은 할 말이 없었다. 검군은 근랑을 하직하고 사인들이 독약을 탄 음식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그 죽음의 좌석으로 갔다. 검군의 진심을 모르는 어리석은 무리들은 친절을 다 하는척 하면서 그
를 대접했다. 독이 들어 있는 음식은 검군 앞에 성대하게 차려져 있다. 검군은 그것을 먹고 죽어갈 자신을 생각해 본다.
"나의 죽음으로 사악한 그들의 마음에 뉘우침이 생기고 그들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어 주기를" 마음 속으로 빌었다.
검군은 태연하게 독이 들어 있는 음식을 먹고는 조용히 죽었다. 이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떠 하였겠는가? 인간다운 마음이 다소라도 남아 있었다면 눈물이 있었을 것이고 눈물이 있었
다면 뉘우침이 있었을 것이다. 어떤 분은 검군의 죽음을 평해서 말하기를
"검군의 죽음은 장소를 가리지 못하였으니 비교해서 말한다면 태산을 새털보다도 가벼히 한 것이다."라고 했다. 즉 태산보다 더 무섭게 여겨야 할 목숨은 나라를 위한 큰일에 바쳐야 할 것이지 그
런 일에 버린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검군은 성인도 아니고 부처님도 아니다. 화랑의 낭도로서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대장부로서의 길을 닦는 젊은이에 불과하다. 그런 젊은이가 내 목숨 하나 버리고 많은 동료들의 마음에
의로움을 깨닫게 하고자 했으니 역시 갸륵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젊은이가 많이 있었던 신라는 역시 자랑스러운 시대였고, 통일의 주인공이 되었는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였음을 새삼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