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여행

경주역사문화학교의 신라문화재강사님과 함께하는
교과서 여행은 아이들에게 창의력을 키워주는다양한 체험학습

#당일 #1박2일
#경주핫플 #황리단길
#주상절리

불국사

출처 : 경주시 관광자원 영상이미지

영원한 순교자 이차돈(異次頓)

| 2005.01.27 | 조회 2754
법흥왕(法興王)이 왕위에 오른지 14년이 되었다.(A. D 527) 왕은 크게 불사를 일으켜 온 백성들이 복을 빌고 나라의 태평함을 기원하는 도장으로 삼고저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중신들은
눈 앞의 일만 생각하고 먼 훗날의 일을 헤아릴 줄 몰라 왕의 뜻에 찬성하지 않으니 여간 딱한 일이 아니다. 생각하면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온지도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완고한 조정의 중신들의 불
료에 대한 태도는 누그러지지를 않는다.
불교가 고구려에 들어 온 것은 아주 오랜 옛날(내물왕 17년 A.D 372)이었으나, 곧 국교(國敎)로 삼아 온 국민이 믿게끔 했다. 신라에도 눌지왕때(A. D 417∼453)에는 불교가 들어와서 민간에 신
앙되었다. 즉 묵호자(墨胡子)라는 중이 고구려에서 일선군(一善郡-지금 善山)에 들어와서 모례(毛禮)씨 집에 숨어 살면서 포교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럴 때 양(梁)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왔는데 의
복과 향(香)을 가지고 와서 왕에게 바쳤다. 그러나 그 향의 이름도 알수 없거니와 그 용도가 무엇인지 짐작 조차 할 수가 없다. 조정에서는 하는 수 없이 사람을 시켜서 그 향을 가지고 돌아다니면
서 그 용도를 아는 사람이 있는지 알아보게 했다.
그러나 아는 사람이 있을 수가 없다. 이때에 묵호자가 이것을 보고 이름과 용도를 알려주고 이것을 태우면 향기가 아름답고 그럴때에 원하는 바를 빌면 신령님의 응답이 있을 것이라고 일러 주었
다. 이때에 마침 공주님이 병석에 누워 있었는데 백약이 무효라 임금님의 심려가 대단했다. 묵호자의 말을 들을 임금님이 그를 불러 향을 피우고 불공을 드리게 했더니 얼마 안되어 그렇게 어렵
던 병이 깜쪽같이 나아졌다. 눌지왕은 너무나 기뻐서 많은 예물을 주고 후하게 대접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신라에 불교가 포교된 것 같다. 그 후 소지왕(炤知王)때에 다시 아도(我道)라는 스님
이 들어와서 포교에 힘을 썼고 그에 따라 온 제자 세사람은 아도가 죽은 후에도 계속해서 포교에 힘을 써서 민간에는 제법 불교가 유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법흥왕은 일찍부터 깊이 불교를 믿어
왔고 왕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하 가운데도 역시 독실한 신자들도 있었다.
그 중에서도 이차돈은 법흥왕의 뜻을 잘 알고 있었고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정성을 다해 받들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조정의 대부분의 신하들은 날이 갈수록 더욱 강력하게 불사를 반대하니 이제
는 어찌 할 방도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이차돈은 일대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이 몸이 하나 죽어서 불도가 일어나는 바탕이 된다면 몇 백번 죽어도 한이 없다"고 마음에 몇 번이고 되풀이 했다. 이차돈은 드디어 임금님 앞에 나아가서 아뢰었다.
"청하옵건데 소신을 참형으로 다스리어 조정의 여러 이론을 하나로 정하는데 쓰시오소서"
법흥왕은 놀라면서 말했다.
"그것 무슨 말이냐? 내가 불도를 행하고져 하는 것은 자비와 도를 널리 펴므로서 복된 나라를 이룩하고저 함인데 어찌 죄없는 사람을 죽일 수 있겠는가? 당치도 않은 소리 다시는 하지 말라" 이차
돈은 굳은 결의를 보이면서 다시 아뢰었다.
"신의 죽음을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소신이 한번 죽음으로 해서 불도를 행할 수 있는 실이 열린다면 비록 죽는다해도 유감이 있어오리까. 부디 소신의 목을 치므로해서 나타나는 이적을 믿
으소서"
이차돈의 결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드디어 법흥왕도 일대결심을 했다. 곧 군신들을 불러 불법 시행을 논의하니 군신들은 입을 모아 불도시행을 반대하고 나섰다.
"지금 중들을 보건데 머리를 깎고 이상한 복장을 하며 의론하는 것이란 모두가 기괴할 뿐이니 이러한 것을 그대로 버려 둔다면 장차 해괴한 일들이 가득하여 걷잡을 수 없는 픙조가 되어 후회해
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신들은 비록 중죄를 받는다 해도 분부를 받자옵지 못하겠나이다. 통촉해 주시옵소서"
이렇듯 중신들의 반대는 강경했다. 이때에 이차돈이 어전으로 나와 아뢰었다.
"지금의 군신들의 의견은 당치도 않는 말인가 합니다. 불교는 그 교리가 심오하고 나라와 백성들에게 복을 가져오는 훌륭한 교이오니 불법을 시행함은 곧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되는 일인가 하옵
니다. 원컨대 크게 불법을 일으키어 백성들을 복되게 하옵소서"
이차돈의 청은 자못 간절하다. 이차돈의 말을 듣고 생각에 잠기던 버흥황은 무거운 입을 열었다. "모든 신하들은 하나 같이 불도 시행을 반대하는데 이차돈 너 홀로 불도의 시행을 주장하니 한 조
정에서 두가지 의론을 쫒을 수 없는 일이니 너를 사형에 처함으로서 의론을 하나로 정하겠다." 임금님의 명령은 가을 서리처럼 차가웠고, 사형의 준비는 곧 이루어졌다.
형틀에 매여진 이차돈은 마지막으로 말을 올린다.
"소신은 불법을 위하여 형을 받습니다. 만약에 불법이 영험이 있다면 신의 죽음에는 반드시 신기한 일이 있을 것이오니 그것을 보면 중신들도 감히 불법을 반대 할수는 없을 것입니다.
임금님의 크나큰 뜻으로 불법이 널리 펴게해 주소서"
아치돈은 왕과 중신들을 비롯한 모든 신하들과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목이 잘리게 되었다. 그런데 과연 이적은 일어났다. 놀랍게도 아차돈의 목이 잘릴 때 젖과 같은 피가 하늘 높이 솟아
올랐으며 지켜보던 사람의 옷을 희게 물들게 한 것이다.
어디 그것 뿐인냐, 하늘과 땅이 진동하며 꽃비가 휘날리고 아름다운 음악소리가 하늘에서 울려나왔으며 그런 가운데 잘린 이차돈의 머리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적은 다시 계속되어 하늘로 올라간 그 머리가 서라벌의 북악에 내려온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하도 놀라와 목이 하늘에서 내려온 그 자리에 절을 세워 자추사(刺楸寺)라고 했는데 지금
의 백율사(栢栗寺)가 그것이다. 생각하건데 『자추사』근처에는 절개를 나타내는 『잣나무』와『보리수』와 통하는 『밤나무』를 심었던 것 같으며 『잣』과『추』는 곧 잣과 밤에 통하니 『자
추사』곧『백율사』로 변한 것 같다.
하여튼 이차돈의 죽음에 따른 이적은 불교의 영험을 유감없이 나타내었다. 한 사람의 신하도 불법을 시행하는데 반대하지 못했다. 이리하여 신라 불교는 비로소 공인되게 되었으며 신라의 그 찬
란한 불교문화는 이 차돈의 순교에서 싹트게 된 것이다.
한 사람의 죽음이 어찌 이보다 더 위대한 열매를 맺을 수가 있겠는가. 이차돈의 죽음이야말로 실로 영원한 "삶" 이라고 하겠 1 ? 열었던 것이다.
역사에는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고 충성을 다한 예는 많다.
그러나 삼대가 하나 가이 이렇게 충성을 다한 예는 찾을 수가 없다. 신라의 그 위대한 통일의 대업과 영광에 가득한 역사는 이렇게 세계의 역사에 예를 찾을 수 없는 충성에 의해서 이루어졌음을
생각할 때 새삼 머리가 수그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