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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

출처 : 경주시 관광자원 영상이미지

신라의 꽃 왜국땅에 지다

| 2005.01.27 | 조회 2676
박제상(朴堤上)의 충절 -
4세기 말에서 5세기에 걸친 시대의 신라(17대 내물왕에서 19대 눌지왕대)는 이제 간신히 국제 무대에 발을 들여놓았으며 북쪽으로는 고구려, 서쪽으로는 백제, 그리고 바다로부터는 왜국의 압력
을 받고 있었으며 침략도 쉴 사이없이 받아야만 했다. 신라로서는 가장 어려운 처지에 있었는 시대로서 국난의 극복을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쓰던 때였다. 그 방법의 하나가 강대국에 볼모를 보내
서 국력을 기를 시간을 버는 일이었다.
이래서 내물왕 36년(A. D390)에는 왕자 미사흔(未斯欣)을 왜국에 보내야만 했는데 눌지왕 3년에는 왕의 동생되는 복호(卜好)를 또 다시 고구려로 보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눌지왕의 마음은 한 없이 괴로웠다. 세월은 흘러갔으나 고구려도 왜국도 볼모를 돌려 보낼 생각은 없는 듯 했다. 왕은 해가 거듭될수록 이국 땅에서 온갖 고생 속에 시달리고 있을 아우들 생각이
간절해졌다. 왕위에 오른지도 이미 10년이다. 이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왕은 신하들을 모아 친히 연회를 베풀고 눈물로 호소했다.
"옛날 부왕께서는 만백성을 생각하고 나라의 평화를 얻기 위해 사랑하는 아들을 왜국으로 보냈던 터이나 끝내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한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나셨고, 그 후에 나 또한
고구려와의 화친을 위해 친아우를 적국에 보내지 않을 수 없었소. 그런데 이렇게 수 많은 세월이 흘러 갔지마는 내 아우들을 돌려 보내주지 않으니 이렇게 답답한 일이 또 어디있다 말이오, 내 비
록 왕좌에 앉아 부귀를 누리고 있지마는 하룬들 눈물없이 지내는 날이 없소, 다행히 두 아우를 만나 함께 선왕의 영전에 고할 수만 있다면 그 은혜를 온 나라 사람과 함께 보답하겠건만 누가 이 계
책을 꾀할수 있겠소?"
왕의 눈에서는 눌물이 흘렀고 신하들도 옷소매를 적셨다. 신하들은 숙의를 거듭한 끝에 볼모르 잡혀 있는 왕재를 무사히 구출해 올 수 있는 큰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 할수 있는 사람은 양산군(梁
山郡)의 태수로 있는 박제상(朴堤上)밖에는 없음을 알았다.
박제상을 5대 임금인 차사왕의 5대손이며 조부는 갈문왕 아도이고 부친은 파진찬(波珍餐) 물품(物品)이며 어릴때부터 남달리 침착하고 담이 컸으며 지혜가 뛰어나서 장차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할
사람이라고 여러 사람의 기대를 모으고 있었다.
임금의 부름을 받은 제상은 말을 달려 궁궐로 왔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안 그는 곧 어전으로 나아가 사배하고 아뢰었다.
"신이 듣자옵건데 임금님께서 근심이 있을 때에 이것을 풀어 드리지 못한다면 신하된 자의 다시 없는 욕이며 군왕이 욕을 당했을 때 그것을 같기 위해서 신하된 자는 목숨을 버려야 한다고 합니
다. 만약에 일이 어렵고 쉬운 것을 감안해서 쉬운 일만 골라서 한다면 어찌충성이라고 하겠으며 생사를 생각해서 살길만 찾는다면 어찌 용감하다고 하겠나이까. 신이 비록 불초하오나 왕명을 욕
되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제상의 눈은 빛났고 이마에는 죽음을 각오한 굳은 의지가 엿보였다. 왕은 기뻐하여 박제상의 손을 잡고 격려하며 술을 나누고 성공을 빌었다.
박제상은 먼저 복호를 구출할 계획을 세우고 몰래 고구려로 숨어 들어갔다. 고생 끝에 복호와의 연락이 이루어져서 탈출하는 날짜와 거기에 따른 상세한 일들을 서로 의논 할수 있었다. 약속한
날짜는 눌지왕 10년 5월 15일이었고 고성(高城)의 바다가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날이 가까워지자 복호는 병을 핑계하고 며칠 동안 조회에도 나가지 않고 감시하는 사람의 마음이 출리게 하는데 힘썼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하늘도 도우려고 하는지 그날은 달도 구름속에 모습을 감추고 가야 할 길을 알맞게 감추고 있었다. 숙소를 빠져나온 복호는 있는 힘을 다해서 고성의 해변으로 달렸다. 그러
나 복호의 탈출은 곧 발각되었다. 성이 난 고구려왕은 날랜 무사 수십기를 가져 복호의 뒤를 쫒게 했다. 그성의 해변 가까이에 왔을 때 고구려 군사가 바로 뒤에 닥쳤다.
배에 올랐을 때는 화살이 닿고도 남을 가까운 곳에까지 왔다. 그러나 고구려 군사들은 인정과 눈물이 있는 의리의 사나이들이었다. 복호가 볼모로 있을 때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항상 온정과
신의로써 대했던 까닭에 차마 복호를 쏠수가 없어서 화살의 촉을 뽑고 쏘았기 때문에 무사 할 수가 있었다. 박제상의 충성과 복호의 인덕(仁德), 그리고 고구려 군사들의 두터운 호의로 두 사람은
범의 입속 같은 위험한 지경을 벗어나서 그립던 고국의 품에 안길 수가 있었다. 아우를 만난 눌지왕의 기쁨은 표현 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형제의 만남이 반가우면 반가울수록 바다 멀
리 왜국에 있는 또 한 아우의 생각이 더욱 간절했다.
40년 가까운 기나긴 세월을 타국의 하늘 밑에서 고국을 그리면서 눈물로 세월을 보내고 있을 동생을 생각하면 가슴이 터질 것만 같다. 눌지왕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한 동생만 만나게되니 마치 한 쪽 팔만 얻은 것 같고, 한 쪽 눈만 찾은 것 같아서 한편 즐겁고, 한편 더 슬퍼지디ㅗ다." 이 말을 듣자 박제상은 임금님의 못다 찾은 한쪽 눈을 마저 찾기 위해 왜국
으로 떠날 것을 결심했다. 그는 임금님께 하직 인사를 올리고 그 길로 곧 왜국으로 향했다. 그는 집에도 들리지 않고 말을 달려 왜국으로 가는 항구인 율포(栗浦)에 이르렀다. 이 소식을 들은 박제
상의 부인은 길에서라도 남편의 얼굴이나 보려고 달려 나왔다.그러나 남편은 이미 떠난 뒤였다. 부인은 뒤따르다 모래 위에 엎드려 소리 내어 울었다.
박제상 부인이 길다랗게 엎드려 울었던 그곳 모래를 후세 사람이 "장사(長砂)"라고 하였다.
그녀는 울다가 몸을 일으켰다. 울포까지 뒤쫒아서라도 한번 만나야겠다는 생각에서 였다.
이것이 영원한 이별이 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몸이 늘어져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 후 이곳을 벌지지(伐知旨)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사지가 벌어진 곳"이라는 뜻이며 망덕사지(望德寺址)가 있는 남쪽편 하천변 들을 말한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그녀는 말을 달려 율포에 당도했을 때 그의 남편은 이미 배 위에 있었다. 그녀는 소리쳐서 남편을 불렀지마는 그는 다만 손을 흔들어 답할 뿐 배를 돌리지 않았다. 외국에 도착
한 박제상은 떠나올 때 미리 꾸며두었던 계획대로 거짓말로 왜왕을 속였다."신라왕이 억울하게도 아무런 죄도 없는 내 부형을 처형했다 까닭에 신라를 배반하고 도망해 왔습니다." 미리 계획해서
소문까지 퍼트려 놓은 터라, 여러모로 조사한 왜왕은 박제상의 말을 빋고 그의 소원에 따라 불모인 미사흔(未斯欣)의 감시역을 맡겼다. 그는 미사흔을 데리고 나가 고기와 짐승을 잡아서는 왜왕
에게 바쳐 더욱 신임을 얻었다. 날이 갈수록 왜왕의 신임은 두터워지고 그럴수록 그들의 탈출 계획도 무르익어 갔다.
그러던 어느날 드디어 기회는 왔다.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지척을 분별 못할 이른 새벽이었다. "다시 없을 좋은 기회입니다. 빨리 떠나소서, 튀는 제가 맡겠습니다."
"차마 나 호자는 떠날 수 없소. 함께 떠나도록 합시다."하고 박제상의 소매를 잡는 미사흔이었다. "제가 함께 떠나면 왜인들이 알고 뒤쫒을까 두렵사옵니다. 저는 이곳에 남아 그들이 뒤쫒는 것을
막을까 합니다. 부디 떠나소서. 공(公)께서 무사히 귀국할 수만 있다면 저는 열 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미사흔은 하는 수 없이 울면서 박제상을 하직하고 마침 왜국에 와 있던 신라인인 강구려 (康仇麗)라는 사람의 호송을 받으면서 그 곳을 빠져 나왔다. 박제상은 미사흔이 있었던 방에 들어가서 아
침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키는 왜인이 들어와서 확인하려고 하니 어제 사냥에 지텨 곤하게 잠이 들었으니 그냥 두라고 만류했다. 그러나 한 낮이 지나고 어느듯 저녁 때가 되었는데도 미사흔이
보이지 않았다. 수상하게 여긴 그들이 만류하는 박제상을 제치고 방안에 뛰어 들어와 보니 사태는 이미 끝난 뒤였다. "우리 임은 떠난지가 벌써 오래 되었네" 박제상은 웃으면 말했다. 사실을 안
왜왕은 군사를 시켜 말을 타고 급히 뒤를 쫒게 했지마는 너무 시간이 지난 뒤였다. 성난 왜왕은 박제상을 잡아 가두고 문초를 시작했다.
"너는 어찌하여 신라의 왕자를 도망치게 하였는가?"
"나는 신라의 신하로서 해야 할 도리를 다 했을 뿐이다."
"너는 이미 내 신하가 되겠다고 맹서한 바 있거늘 어찌하여 일구이언을 하는고? 그 말을 고치지 않으면 모진 악형으로 다스릴 것이로다"
"내 소원을 이루기 위해 거짓으로 항복했을 뿐, 내 어찌 조국을 버리고 왜국의 신하가 될 수 있겠는가?"
박제상의 태도는 너무나 당당하며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조금도 움직임이 없다. 탄복한 왜왕은 때로는 높은 벼슬로 유혹하고 때로는 모진 고문으로 위협했지마는 박제상의 태도는 태산과 같이
움직이지 않고 마지막으로 단호하게 외치는 것이었다.
"나는 죽어서 신라의 개나 돼지가 될망정 왜국의 신하가 되고 싶지는 않으며 신라의 형벌을 받을망정 왜국의 별슬은 받지 않겠노라"
성이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오른 왜왕은 박제상의 발의 껍질을 벗기고 새(갈대와 비슷하며 잎이 칼날 같다)를 베어 깔아두고 그 위를 걸어가게 했다. 가죽을 벗긴 발의 살은 칼날같은 새 잎에 의해
난도질 하듯 되었고, 피는 흘러서 새 잎을 적시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이상하게도 새 잎에는 마치 핏자국과 같은 붉은 반점이 생기게 되었는데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제상의 피"라고 하게 되었
다. 새잎 위를 걷게한 뒤 왜왕은 다시 물었다. "너는 어느 나라의 신하냐?" 마지막 힘을 모아 박제상은 대답했다. "나는 신라의 신하로다" 왜왕은 어떠한 방법으로도 그의 충절을 꺾을 수 없음을 알
고 목도(木島)라는 섬에서 불에 태워 죽였다.
한편, 미사혼은 박제상의 충절의 덕분으로 무사히 고국 땅을 밟을 수가 있었다. 급한보고가 미리 조정에 당도했다. 눌지왕은 놀랍고 기뻐서 어찌 할 바를 몰랐으며 우선 백관을 시켜 "굴혈역"에 나
가 맞이하게 하고 잇달아 왕도 복호를 데리고 궁궐 밖으로 나가 동생을 맞이했다. 아우를 얼싸안은 왕과 형제들의 눈에서는 눈물이 솟아졌다.
형제가 너무나 오랜만에 만난 기쁨도 있겠지마는 그 뒤에 숨은 박제상의 충절에 대한 슬픔도 한데 뒤섞인 눈물이었다.
왕은 온 나라를 들어서 큰 잔치를 베풀고 대 사령을 내려 죄수들을 풀어 그들도 기쁨을 함께 하게 했으며 박제상의 부인을 국대부인(國大夫人)으로 높이고 그의 딸로써 미사흔의 부인으로 삼았
다. 미사흔은 무사히 돌아왔다. 그러나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국대부인으로불리는귀한 몸이기는 하였으나 마음은 바다 멀리 남편에게로 날아갔다. 영영 돌아오지 못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
다. 실오리 같은 가냥픈 희망이었다. 기다리다 못한 부인은 남은 딸 셋을 데리고 동해바다 왜국에의 뱃길리 바로 보이는 치술령( 述嶺)으로 올라 갔다. 푸른 바다에 떠오는 돛대만 보아도 행여나
하고 기다리며 하나님에게 빌었다.
그러나 돌아올 리 없는 박제상이었다. 부인은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그만 화해서 돌이 되었고 영혼은 남편 찾아 왜국으로 날아 갔다. 부인이 화해서 된 돌을 세상 사람들은 망부석(望夫石)이라
고 부르게 되었다. 남편을 그리고 기다리다가 그만 돌이 된 너무나 가엾은 이야기다. 세상 사람들은 치술령 위에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고 그 넋을 위로했다.
세상에는 충신도 많고 열녀도 많다.
그러나 박제상 같은 충절은 고금에 드문 이링며 망부석이 되도록 남편에 쏟은 절개도 듣지를 못했다. 이 충절에 이 절개! 신라의 혼은 영원히 겨레의 앞을 비추는 등불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