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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주시 관광자원 영상이미지

관음보살의 양아들 최승로(崔承老) 유교정책을 세우다

| 2005.01.28 | 조회 2544
최승로는 고려초기의 대학자이며 태조, 혜종, 정종, 광종, 경종, 성종의 6대 임금 밑에서 벼슬을 했으며 고려의 문치주의적 제도를 확립시키는데 가장 큰 역할을 담당했다.
고려의 정치 체제가 완성된 것은 제 6대 성종부터라고 해야겠는데 모든 정치를 유교주의에 의해서 하도록 했다.
이러한 정책은 모두 최승로의 주장으로 이루어졌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 최승로가
「관음보살의 양자」라고도 할수 있을 정도로 불교와의 관계가 깊으니 참으로 시이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최승로가 태어난 해는 신라에서 포석정(鮑石亭)의 비극이 있었던 경애왕(景哀王) 4년(A. D 927)이였다. 그의 아버지는 원보(元甫)라는 벼슬에 있었는 최은함(崔慇 )이였는데 늦도록 아들이 없
었다. 음함은 중생사(衆生寺)의 관음보살 앞에서 정성을 다해 기도를 드렸더니 영흠이 있어 아들을 낳아 승로를 얻게된 것이다. 이 중생사의 관음보살이 기적을 낳는 보살인데 중국에서 우리 나
라를 동경해서 건너온 유명한 화공이 만든 것이다. 그 화공의 이름은 전하지 않으나 장승요(張僧繇)라고 하는 설도 있다. 이 유명한 화공이 신라로 오게된 까닭은 다음과 같다.
당시 중국의 황제에게는 총애하는 여자가 있었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황제는 그 아름다움을 영원히 남겨두기 위해서 초상화를 그리도록 했다. 당대 최고의 미술가로 이름이 높은 화공에게 그 명
령이 떨어졌다. 그 화공은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초상화를 그렸다.
황제가 사랑하는 그 여인을 너무나 닮은 훌륭한 초상화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마지막에 가서 화공은 큰 실수를 했다. 붓을 떨어뜨려 배꼽 밑에 붉은 점이 찍혀버린 것이다.
놀란 화공은 그 점을 지워 버릴려고 애써 보았으니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 화공은 생각했다. "이런일이란 있을 수 없는 실수다. 그런데 이 붉은 점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실수로 찍혀진 붓 자욱 같지는 않다. 그렇다. 이것은 틀림 없이 날때부터 있었는 사마귀가 틀림 없
을 것이다." 이렇게 단정을 하고는 그대로 초상화를 황제에게 올렸다.
초상화를 본 황제는 너무나 훌륭한데 감탄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배꼽 밑에 그려진 이 붉은 사마귀는? 이 사마귀는 황제와 그 여자 본인 밖에는 아무도 모를 것인데.. 황제는 크게 성이났
다. 그 화공이 보지 않고는 배꼽 밑에 있는 사마귀를 이렇게 꼭 같이 그릴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아무죄도 없는 화공은 결국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처형되는 날만 기다리게 되었다. 그런데 화공의 억울한 처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재상이었다. 그는 죄 없는 화공이 죽는 것을 보고 있을 수
는 없었다. 그는 황제에게 아뢰었다.
"저 사람은 마음씨가 착하고 정직하니 거짓을 말할 사람이 아닙니다. 틀림 없이 하늘의 가르침을 받아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황제는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 사람이 그렇게 착하고 정직하며 하늘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면 내가 지난 밤에 꿈에서 본 사람을 그려서 바치게 하오. 틀림이 없으면 그를 용서하리다" 그
화공은 생각을 가다듬고 붓을 들었다. 그가 그린 것은 십일면관음보살(十一面觀音菩薩)상이었다. 이것을 받아 본 황제는 또 한번 놀랐다. 꿈에서 본 모습 그대로가 아닌가!
황제는 그제야 그 화공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풀어 주었다. 옥에서 나온 화공은 중국이 싫어져서 불교의 나라, 희망의 나라인 신라에 건너 오게 되었다.
신라에 온 화공이 맨 먼저 정성을 다해서 만든 것이 중생사의 고나음보살상이였다. 온 나라 사람이 모두 우러러 공경하고 기도하여 복을 받았다. 최은함이 기도해서 아들을 얻게 된 것 도 바로 이
관음보살이었다. 관음보살에 빌어서 낳은 최승로가 설달도 채 못되어서 포석정의 변이 일어난 것이다. 후백제의 견훤의 습격을 당해서 서울은 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관리들은 더욱 위험했다. 은함은 하는 수 없이 어린승로를 안고 중생사에 찾아와서 관음보살에 맡기도록 했다. "이웃 나라 군사가 쳐들어 와서 일이 위급해졌습니다. 화가 이 어린 자식에 미칠까
두렵습니다. 진실로 부처님께서 이 아기를 점지해 주셨다면 큰 자비로써 지켜주시고 다시 우리 부자가 만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은함은 울면서 기도하고 아뢰었다. 그리고는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관음상의 대좌 밑에 감추고는 울며 울며 그 자리를 떠났다.
적병이 물러가고 다시 평화로운 날이 돌아오는데 반달이 걸렸다. 몇일만 피한다는 것이 어떻게 되고 보니 절망만 남았다. 은함은 절망에 어두워진 마음을 안고 중생사로 왔다.
떨리는 손으로 아이를 감추어둔 부처님의 대좌밑을 열어보고 그는 기쁨의 소리를 질렀다.
"살아있다! 살아있다" 은함은 놀라운 사실에 눈을 의심할 지경이다.
반달만에 왔는데도 아이는 살아있지 않는가! 그것도 목숨만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살결은 금방 목욕한 것처럼 부드럽고 젖냄새가 입가에 남아있으며 생긋생긋 웃는 무심한 얼굴은 어머니 품에
안겨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기적! 이 놀라운 기적! 관음보살이 점지해 주셨고 보름동안이나 젖을 먹여 보호하고 길러준 아이, 이 아이가 최승로다. 관음보살의 아들이라고나 해야 할 최승로이다.
이러한 최승로가 불교의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면 이상 할 것이 없지마는 그는 오히려 불교의 폐단을 우려하고 유교 교리에 의해 고려왕조의 통치원리를 확립했으니 우리는 최승로의 행적에 더욱
흥미를 느끼고 그 공적을 높이 평가한다. 그는 나이 겨우 열두살에 고려 왕건 태조 앞에서 「논어」를 강의해서 태조를 감탄 시켰다. 태조는 신동 승로를 귀여워 하고 장래에 큰 기대를 걸었다. 대
대의 임금들이 그를 특별히 대우한 것도 태조의 이와 같은 은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뛰어난 학식과 탁월한 정치적 안목은 대대의 임금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정치의 잘잘못을 지적하는
데 사사로운 정을 섞지 않았으며, 규탄하고 시정해야 할 것은 소신을 굽히지 않고 의견을 올렸다. 정치개혁에 대한 그의 의견을 간추려 6대 성종 원년(A.D 982)에 왕에 올린 것이 유명한 시무 28
조이다. 시무 28조는 지금 22조만 전하고 있으나 태조에서 경종까지 5대의 정치를 놓고 거리낌 없이 비평하고 사회의 별폐를 날카롭게 파헤치고 있다. 이 시무 28조만 보드라도 최승로가 단순한
학자가 아니고 현실감각이 날카로운 문명비평가이며 정치가였음을 알 수 있다.
최승로의 시무 28조 가운데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불교와 유교에 대한 정책이다.
먼저 불교에 대한 건의를 살펴보자! "불법을 믿는 그 자체는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마는 제왕과 서민과는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서민들이 크게 제를 올린다고 해도 그것은 자기 자신
의 재물을 소비하는데 그치지만 제왕이 베푸는 제는 이모저모로 백성을 괴롭히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화복귀천(禍福貴賤)은 태어날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니 매사는 이 이치에 따라야 한다. 불
교는 어디까지나 다음 세상을 위한 인과응보(因果應報)를 가르치는 것이므로 나라를 다스리는데는 그리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종교로서의 불교를 비난한 것은 아니다. 다만 나라에서 지나친 불교 행사를 벌여 많은 국비를 낭비하고 결국은 백성에까지 폐단을 끼치는 점을 경계했던 것이다.
더욱이 불교를 가르쳐 "나라를 다스리는데엔 그리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단정한 데에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의 출생 전설에서 본바와 같이 불교와는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그가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보다 큰 불교의 폐단을 막을려고 애를 썼으니 참으로 훌륭한 식견이라고 않을 수 없다.
고려의 불교가 걸어간 길, 그리고 그 폐단을 고려할 때 식견의 높음을 한층 더 느끼게 한다.
불교를 개인적인 신앙에만 고정시킬 것을 주장한 그는 정치늬 지도원리로써 유교를 택했다.
불교와 유교의 관계 그리고 유교의 위치를 그는 다음고 같이 간단하고 명백하게 규정지웠다. "유교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 그 근본이 있는 것이며 불교에서 내 몸을 닦는 것은 내세(來世)를 위한
일이다.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현세의 시급한 과제인데 어찌 제왕으로써 이 시급한 일을 버리고 도리어 먼 훗날의 일을 위하여 그릇된 처사를 할수 있겠는가?"
유교와 불교와의 관계 그리고 정치학으로서의 유교에 대한 그의 이론을 그는 실천 하는데에 힘을 쓰기도 했다. 그가 성종(成宗)에게 시무 28조를 올린 그 이듬해에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 平
章事)에 임명되자 시대의 폐단을 바로 잡는데에 힘을 기울였고, 다시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으로 임명되어 실질적으로 국무총리와 같은 지위에 올라 정치 수완을 발휘했다.
그의 주장으로 거국적인 불교행사인 팔관회(八關會), 연등회(燃燈會)등도 폐지되었다. 그의 주장, 그의 수완으로 고려 왕조의 성격을 규정지웠음을 생각할 때 신라의 영광이 끝이 없음을 다시한
번 실감한다. 관음보살에 빌어서 태어난 최승로, 위난을 당해서는 고나음보살의 젖을 먹고 그 보호아래 생명을 연장한 최승로, 그가 불료의 폐단을 염려하고 억불의 정책을 썼다는 것은 참으로
위대한 교훈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
우리는 최승로에서 참다운 지성(知性)이라는 것이 어떠한가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최승로(崔承老)
연대 : 신라 경애왕 4(927)∼고려성종(989) (63세)
경력 : 시로는 문정(文貞), 청하후(淸河候)
관직은 문하수시중(門下守侍中)
태조에서 성종까지 6대 왕을 섬겨 유교 교리에 의한 고려의 지도이념 수립후에 태사(太師) 추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