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여행

경주역사문화학교의 신라문화재강사님과 함께하는
교과서 여행은 아이들에게 창의력을 키워주는다양한 체험학습

#당일 #1박2일
#경주핫플 #황리단길
#주상절리

불국사

출처 : 경주시 관광자원 영상이미지

의술로써 원(元) 나라를 굴복시키다

| 2005.01.28 | 조회 2269
의성(醫聖) 설경성(薛景成) -
세상에는 기인(奇人)도 많고 도인(道人)도 많다. 우리의 설경성은 기인이고 도인이였다. 의술에 있어서는 고금에 그 유가 드물정도로 뛰어나서 원나라와 고려에서 신인(神人)으로 알려졌다. 두나
라 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지마는 교만함이 없었고 원한다면 천하의 부자도 될 수 있었지마는 재물을 멀리했다. 틀림없는 기인이요, 도인이였다.
설경성은 77세의 평생을 의술을 연구하고 그것을 통한 사회에의 봉사만을 유일한 낙으로 삼고 살았다. 자신이 말하기를 계림인(鷄林人)이며 설총의 후예라고 했으니 경주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대대로 위업을 천직으로 삼았고 명의(名醫)의 이름을 많이 냈다.
그가 태어난 것은 고종(高宗)24년(A.D 1237)이였으니 몸고의 침략을 당해서 온 나라가 어지러울 때였다. 몽고는 고종 18년 이래 고려에 대한 침략의 마수를 펴서 각처에서 싸움이 계속되었다. 고
려는 서울을 강화도로 옮기고 끝까지 그들과 싸울 것을 결심했다.
설경성이 태어난 이듬해인 고종 25년에는 몽고병이 경주에 쳐들어 와서 신라의 유물 유적을 많이 불사르고 물러갔는데 황룡사의 9층 탑이 불탄 것도 바로 이때였던 것이다.
몽고와의 전쟁은 그 후도 오래 계속되어 실질적으로 전쟁이 끝난 것은 고종 46년(A.D 1259)이나 왕이 강화도에서 나와 서울을 다시 개성으로 옮긴 것은 원종 11년(A.D 1270)이였으니 참으로 긴
전쟁시대였다. 따라서 설경성은 34세까지의 젊은 한 시절을 전쟁 속에서 보내야만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회환경은 의업에 대한 그의 정열을 더욱 불태우게 했는 것 같다. 전쟁이란 가장 의술
을 필요하고 따라서 그것을 발전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그는 일찍 의술로써 과거레 급제하여 상약의좌(尙藥醫佐)라는 벼슬에 올랐다. 나이 30세에 벌써 명의라는 칭찬을 받았다. 명성에 따라 벼슬도 올라서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거쳐 첨의사
사(僉議司事)에 이르렀다.
충열왕(忠烈王)이 병이 났는데 백약이 무효라 모든 전의가 손을 들었다. 마지막으로 왕을 진맥한 설경성은 단 세첩의 약으로 왕을 완전히 치료했다. 이 후로는 설경성의 명성은 온 조정을 휩쓸었
다. 충열왕은 생명의 은인으로 그를 대접하고 병만 나면 설경성외에는 손을 못쓰도록 했을 정도이다.
이럴 때에 원나라의 세조(世祖) 쿠빌라이가 병을 얻었다. 당시의 원나라는 세계를 정복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위치에 있었으며 서울인 연경(燕京)은 세계의 서울인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러
니 이름 높은 의사도 많았다. 세조의 병이니 온 천하에서 명의라는 명의는 다 불러들였다. 그러나 세조의 병에는 차도가 없었다. 세조가 무서운 병에 걸렸다는 소식은 고려에도 들렸왔다. 충열왕
의 왕비는 세조의 맏딸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였는 까닭에 왕비의 근심이 대단했다. 왕과 왕비는 설경상을 보내서 세조의 병을 치료하도록 했다. 원나라 조정에서는 설경성을 달갑게 여
기지 않았다. 천하의 명의가 다 모였는데 고려의 의원이 무엇을 하겠느냐 하는 마음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생각과는 달리 그는 세조의 병을 거뜬히 치료했다. 이제는
온 원나라 조정이 놀랐다. 설경성이라는 고려의 한 의사가 온 원나라를 떠들게 한 것이다. 세조는 설경성이 귀국을 허락하지 않고 그를 총애했다. 그에게는 궁궐에 출입하는 특권을 주었고 세조
앞에서 바둑을 두게하여 이것을 관람할 정도로 가까이 했다. 이러는 사이 2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는 고향을 잊을 수가 없었다. 가족들의 안부도 마음에 걸렸다. 하루는 세조에게 귀국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세조도 말릴 수가 없었다. "어찌 처자식 생각이 나지 않겠는가. 네 돌아가서 온 가족을 이끌고 나에게로 오는 것이 어떠하냐?" 세조는 간절히 이르고 많은 상품을 내리고 귀국하는데 불편이 없도
록 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고향에 돌아온 경성은 가족을 데리고 원나라로 갈까 했으나 가족들이 이국만리 땅에 가는 것을 극구 반대하니 어찌 할 수가 없어 그냥 고려에 남도록 했다. 그러나 원나
라 세조는 경성이 고려에만 있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겨 다시 원에 불러들였다. 이후로는 고려와 원나라를 왕래하면서 의술을 통한 그의 이름을 더욱 빛나게 했다. 세조가 경성에게 기울인 후대
와 원나라에서 떨친 명성을 이루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세조가 죽고 성종(成宗)이 즉위했는데 그에 대한 대접은 여전했다.
마친 경성이 고려에 나와 있을 때, 성종이 병들어 눕게 되었다. 원나라에서는 아무도 고칠 의원이 없어 급히 경성을 불렀는데 역시 그의 의술은 승리였다. 원나라에 있었는 모든 의사들이 항복 않
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이 설경성은 의술로서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에서 제일 가는 나라였던 원나라에서 제일 가는 의사가 되어 크게 나라를 빛냈던 것이다. 그간 벼슬도 올라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고,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귀가 크고 모습이 아름답고 성품이 온화 대하는 사람마다 그를 칭찬 않는 이가 없었다. 원나라 황제로부터 극진한 대우를 받고 고려 왕의 총애도 받았으며 의술에서 세계 제일의 명성을 얻
었으니 지위도 돈이고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위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위해서나 자손을 위해서 벼슬을 얻을려고 하지 않았으며 또한 자신이나 후손을 위해 재물을 탐하지 않았다. 훌륭한
인격을 갖춘데다가 훌륭한 기술을 가졌을 때 비로소 기술도 더욱 빛나는 것이며 하늘도 복을 내릴 것이다.
경성의 아들 문우(文遇)가 과거에 급제하여 성군관 대사성(大司成)에 이른 것도 오랜 세월 동안 쌓아 올린 공덕의 결과이다. 설경성... 국제적으로 이름을 떨친 역사상 최초의 과학자로써 자자손
손 그 이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