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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

출처 : 경주시 관광자원 영상이미지

청백리(淸白吏) 중의 청백리

| 2005.01.28 | 조회 2263
밝은 세상에는 충직한 신하도 깨끗한 선비도 많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어려운 세상에서 사리사욕을 멀리하고 오로지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어루만지는데 전심전력하는 관리는 드물다. 이러한
귀한 관리를 청백이라 하여 예부터 우러러왔다. 그러한 청백리 가운데서도 청백리라고 할수 있는 분이 손중돈(孫仲暾)이며 자(字)는 태발(泰發) 호는 우재(愚齋)이고 본관은 월성(月城)이다. 정
충출기적개공신(精忠出氣敵愾功臣) 에 오르고 계천군(溪川君)에 책봉된 소(昭)의 아들이며 부자 양대에 걸쳐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며 관직에 나아가서는 청백리로서 백성의 추앙을 받
고 학문에 있어서는 선철(先哲)을 이어 후학을 열었으니 이보다 더한 공이 있겠는가? 우재는 어려서 선대와 교분이 두터웠던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 학문이 깊었으며 27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높
은 벼슬에 올랐다. 연산군이 왕위에 있을 때 늙은 부모가 있다고 해서 고향에 가까운 양산군(梁山郡)의 군수가 되었다.
백성을 다스리는데 정성을 다했으며 어질고 청렴한 인덕으로 인해서 온 고을이 태평성대를 노래하기에 이르렀다. 이와같은 선정이 조정에까지 알려져서 다시 경직(京職)으로 들어오게 되어 여러
요직을 거쳤다.
그러나 연산군의 폭정이 날로 심해져서 바른말 하는 신하를 죄주는 세상이 되자 우재도 한때 영어의 몸이 되었다가 끝내는 파직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떠한 협박에도 절개를 지키고 정도(正
道)를 걸어서 추호도 어긋남이 없었다. 중종이 연산군을 밀어내고 들어와서 바른 정치를 하고져 인재를 구할 때 우재는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아 상주목사(尙州牧使)가 되었다. 어지러운 세상이
오래 계속되었던 까닭에 백성을 괴롭히는 나쁜 관리가 많았고 백성들의 피로는 극심했다.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은 가운데서도 오로지 부모의 마음으로 백성을 어루만지고 백성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겼던 까닭에 수탈에 시달려 먹고 살기도 어려웠던 백성들은 다시 삶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상주의 고을에는 격양가(擊壤歌) 소리가 높아지고 오곡은 들에 가득했다. 상주 사람들은
이 훌륭한 목민관의 은덕을 잊을 수가 없어서 생사당(生祠堂)을 단밀현(丹密縣)에 세워 초상을 모시고 춘추에 제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상주목사로 나온지 4년에 그 훌륭한 치적이 조
정에 알려져서 특별히 승지(承旨)에 제수되었고 이어서 공조(工曹)와 예조(禮曺)의 참판(參判)을 거쳐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함경도 4도의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했다. 직접 백성들을 다스리는
외직에 나갈때마다 백성들은 부모와 같이 우러러 모시고 기뻐하였는데 너무나도 청렴하고 추호도 백성의 재물을 다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함경도 관찰사로 있을 때의 일인데, 어느 개울에 다리
를 놓아야겠는데 백성은 너무나 가난하고 국고도 여유가 없어서 불편했지마는 어찌 할수 가 없었다. 관찰사는 몇 년 동안 자기 녹봉(祿俸)을 털러 다리를 놓았는데 백성들이 너무나 기뻐하고 고
마워해서 다리를 만세교(萬歲橋)라고 이름짓고 옆에 비를 세워서 오래오래 그 덕을 사모하도록 했다고 한다.
관찰사를 거친후에 다시 경직으로 나아가 공조판서(工曹判書)에서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르렀는데 인사를 처리함에 공평무사해서 온 조정 백관들이 불평함이 없었다. 네 번이나 대사헌(大司
憲)이 되어 부정을 도려내는데 힘을 다하니 그 덕으로 온 조정이 공평해졌다고 한다. 벼슬을 다시 좌우참찬(左右參贊) 세자빈객(世子賓客)을 지냈고, 다시 봉군의 영예를 입어 월성군(月城君)에
책봉되었다. 67세로 세상을 떠나니 시호는 경절(景節)이고 동강서원(東江書院 : 월성군 강동면)에 모시게 되었다. 벼슬을 온갖 요직을 다했고 영예는 봉군(封君)하기에 이르렀지마는 검소하고 절
약하는 가운데 그야말로 안씨의 빈을 즐겨 비가 새는 집에서 떨어진 자리에서 거처하면서 오로지 나라와 백성만을 걱정한 우재 손중돈은 참으로 청백리중의 청백리며 만고의 귀감이라고 해야 할
것???? ( #병자호란의 영운 최진립(崔震立) 장군?인조(仁祖) 14년(1636) 이해도 저물려는 12월 초아흘(9日) 청(靑)나라의 10만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왔다. 의주부윤(義州府尹) 임경업
(林慶業) 장군은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의거하여 적군을 맞고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굳게 지켰다. 청군은 하는 수 없이 임경업 장군이 지키는 곳을 피해서 서울로 직행하여 출발한지 10여일에 벌
써 서울 근방까지 육박했다.
조정에서는 적군이 서울 가까이에 왔을 때에 비로소 청군의 침입을 알게 되었다.
오래 전부터 청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강경파인 척화파와 평화를 주장하는 주화파(主和派)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되풀이되다가 척화파가 우세하여 전국에 선전교서(宣戰敎書)를 내리고 전쟁
의 준비를 했다는 것이 이 모양이였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였다.
청나라 대군이 이미 서울 교외에 들이닥쳤다는 급보에 조정 대신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밤을 세우며 회의한 끝에 일단 서울을 강화도(江華島)로 옮기기로 하고 우선 봉림대군(鳳林大君)을 비롯하여 남녀 귀족들을 그곳으로 떠나 보내고 왕과 세자도 곧 뒤따르기로 했다.
인조가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비롯한 백관을 이끌고 강화도로 향했을 때는 이미 청나라 대군이 강화도로 가는 길마져도 막을 뒤였다. 왕의 일행은 하는 수 없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난을
했다. 청군은 꼬리를 물다시피 뒤따라 와서 산성을 겹겹으로 에워쌓다.
왕이 남한산성에 포위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각도의 관원들은 군사를 모집하고 또는 관군을 정비해서 남한산성 속의 임금을 구하고저 몰려오기 시작했다.
전라도의 감사인 정세규(鄭世規)도 군사를 정비하여 남한산성으로 진군할 차비를 차렸다.
이때 최진림 장군은 공주(公州)의 영장(營將)으로 있었다. 임진왜란 때 25세의 젊은 나이로 여러 전투에서 왜군을 깨틀고 빛나는 공훈을 세운 후 나라의 중요한 직책을 맡아 오로지 나라 위한 일
편단심으로 살아온 그였으며 나이 벌써 69세의 노경에 이르렀으나 불타는 충성심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감사 정세규는 69세의 노장군을 더욱이 이 엄동설한에 전선에 나가게 하기가 너무
나 민망해서 군대편성에서 제외시키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노장군은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무슨 말씀이오,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국록을 축내온 이 나라의 신하이며 오로지 나라 위한 한 마음으로 살아왔소, 아무리 늙었어도 목숨을 바쳐 국은에 보답할 수는 있지 않겠소"
노장군의 얼굴은 너무나 엄숙했고 그 어조는 너무나 단호했다. 감사도 할말이 없었다.
이래서 최진립장군은 공주의 영병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을 향해 북으로 향했다. 사나운 북풍이 휘몰아치는 사운데 밤 낮을 가리지 않고 재촉하여 마침내 남한산성에서 30리 떨어진 용인의 험천
(險川)에 이르렀을 때는 선봉(先鋒)이 되어 있었다. 험천은 남한산성으로 가는 요지였다. 오랑캐들도 이 지세를 알고 이미 대군을 배치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진군하던 우리 군사와 오랑캐들 사이
에 치열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용감한 장수 밑에 약한 병졸은 없는 법이다. 벌떼처럼 달려드는 적군을 맞아서 우리 용사들은 싸우고 또 싸웠다. 밀려갔던 오랑캐들은 전열을 가다듬고는 또 들이
닥친다. 쳐부셔도 쳐부셔도 한량이 없다. 거기에다 그들은 만주 벌판의 북국에서 단련된 까닭에 한겨울의 전투에서는 우리보다 훨씬 앞서고 있었다.
이러니 어찌하리, 용감함에 있어서는 겨눌 곳이 없는 우리 군사들도 한 사람 두사람 죽어갔다. 어머님을 부르고 임금님의 은혜를 외치면서 죽어갔다.
노장 최진립은 구름같이 모여드는 오랑캐들을 쏘아보면서 태산처럼 버티고 서서 우레같은 소리로 병졸을 격려한다. 달려드는 오랑캐들에게 날랜 솜씨로 화살을 쏘아부친다. 오랜 세월을 두고 연
마된 그의 활솜씨는 참으로 놀라웠다. 백발백중 한 개의 화살도 헛되지 않았다.
그러나 전세는 뒤집이을 수 없엇다. 화살도 다 되고 칼도 부러졌다. 우리 군사들에게 최후의 순간이 닥쳐오고 있었다. 노장군은 마지막까지 그 주위를 지키고 있었던 수하병졸에게 말했다. "너희
들 잘도 싸웠다. 너희들이 할 일은 끝났도다. 앞으로 할 일은 이 자리를 빠져나가 눈앞의 전투를 본군에 전하는 일이다. 나는 마지막까지 이 자리를 지키겠다. 이 자리야말로 내 최후를 장식 할 곳
이니라. 너희들은 깊이 이 자리를 마음에 새겨 두어라"
아무리 명령이기는 하나 수하병졸들은 주공을 홀로 남겨두고 떠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장군의 호령은 추상 같았다. 그들은 눈물을 소매로 씻으며 그 자리를 물러섰다. 이제 싸움은 끝났다. 피
(血)가 튀고 살이 찍히며 목이 떨어지고 사지가 달아나는 처참한 전투는 끝났다.
지옥의 모습을 방불케하던 들판에는 정막이 깔리고 피무지개가 서던 싸움터에는 눈보라마져 몰아쳤다. 노장군 최후의 말을 전해들은 아들과 부하들이 그 자리로 달려갔다. 쌓인 시체 가운데서
노장군의 시신을 발견했다.
"이 자리를 마음에 새겨 두어라." 던 그 자리, "한치도 물러서지 않겠다" 던 그말처럼 태산같이 버티고 섰던 그 자리에서 노장군의 시신을 발견한 그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온몸에는 화상이 마치 고슴도치의 털과도 같이 빽빽이 꽂혀있었을 뿐 아니라 수십 창의 상처까지도 입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들도 노복도 통곡마져도 집어 삼키고 그 처참한 모습에 피 눈물을
쏟았다. 너무나도 처참한 그 모습! 그러나 그것은 충성의 화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내 비록 늙었으되 목숨 하나 바쳐 국은에 보답이야 못하겠소."하던 그 한마디, 이 나라 백성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새겨 두어야 할 그 한마디. 병자호란은 우리 l역사상 가장 수치스런 사건이였다. 병자호란의 그 시대에 살았던 위정자와 장수들. 그리고 국민들이 이 노장군의 마음의 몇분의 일이라도 지
니고 있었다면 삼전도(三田度)에서 오랑캐 왕 앞에서 이 나라의 국왕이 무릎을 끓고 신하의 예를 강요 당하는 굴욕만은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최진립의 장열한 최후의 소식을 들은 인조임금께서는 옷소매를 눈물로 적셨다. 그리고 나라에서 장사를 치루게 하고 예관을 보내서 제사를 드리게 했다. 그러나 두서를 차릴 수 없는 전란중이라
서 그의 충성에 보답하는 그 이상의 조처를 마련할 겨를도 없이 해가 바뀌어 정축년이 되었다. 판중추(判中樞) 김시양(金時讓)이 조정에 건의했다.
"병자의 호란에 순절한 충신 가운데서 최진립이 으뜸이 될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지금까지 그 충절을 찬양하는 조처가 없음은 어진 임금님의 큰 덕에 흠이 될까 두렵사옵니다. 바라옵건데 그의
충절을 밝히는 은전을 베풀어주시옵소서"
이 상소를 받은 인조임금은 즉시 교지를 내려 최진립에 병조판서를 추증하고 아울러 정무(貞武)라는 시호를 내렸을 뿐 아니라 그의 출신 마을인 경주의 이조리(伊助里)를 정표(旌表)하게 했다.
아.. 자랑스럽도다. 최진립, 그의 자는 사건(士建), 호는 잠와(潛窩)이며 청백리로 이름 높았던 예(汭)의 6세손이다. 어려서 부모의 여의니 부모를 애모하는 모습이 너무나 애처로워 보는 사람이
눈물을 흘렸다. 타고난 재주가 뛰어나서 하나를 배우면 둘을 깨닫는 터이라 장래가 지극히 촉망되었다. 나이가 25세에 이르렀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나라에 큰 변란이 생겼는데 내 한 사람
의 영달을 위해 글 공부만 할 수있을 소냐하고 붓을 던지고 과감하게 일어나 근방의 젊은이를 모집하고 왜적과 싸워 이들을 마을에서 소탕했다. 여기에 용기를 얻은 사람들은 도망갔던 발길을 돌
려 졺은 진립을 따랐다. 그는 전봉사(前奉事) 김호(金虎)와 힘을 모아서 왜적을 치고 고을을 지켰다. 전란이 다소 누그러졌을 때 큰 뜻을 세우기 위해 무과에 응시해서 급제했다. 관군의 부장에 임
명된 그는 여러 곳에서 계속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는 결사대 백여명을 이끌고 서생포(西生浦 : 동래에 있음)에 근거를 두고 온갖 나쁜짓을 다하던 왜적을 공격하여 수 없이 많은 적을 사살하여 큰 공훈을 세웠다. 그러나 앞
장서서 싸우던 그도 배꼽 아래에 총탄을 맞았을 뿐 아니라 왼쪽 볼에서 오른편 잇몸으로 관총하는 중상을 입었다. 그럼에도 칼로 뼈를 긁어 탄환을 빼고는 계속해서 군사를 지휘하고 적을 쳤으니
그 용감함은 전사(戰史)에도 찾을 수가 없다. 이러한 공훈으로 공신록에 오르게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어모장군(禦侮將軍)의 품계에 올랐다.
그 후 관직에 나아가서 수군첨절제(水軍僉節制), 경원도호부사(慶源都護府使)등을 역임하기도 하고 또는 부장(部將), 경기수군절도사 겸 교동도호부사(京機水軍節度使 兼 蕎桐都護府使), 공조
참판(工曹參判)등의 요직을 거쳤다. 관직에 있을 때는 오로지 나라를 위한 한 마음으로 충성을 다했고 백성을 다스릴 때는 백성을 친자식처럼 사랑했으며 청렴하고 결백한 마음가짐과 생활은 만
인의 모범이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실오리 하나 털 끝 하나도 탐내지 않고 군졸을 어루만지고 사랑한다"는 말은 어사(御使) 이경여(李敬與)가 임금께 올린 보고서에서 최진립을 평한 한 구절이다.
이해서 그는 공신으로서 뿐만 아니라 청백리(淸白吏)로 기록되어 온 나라에 공포되기도 했다. 진실로 훌륭한 사람은 세월이 갈수록 빛이 나는 것이다. 숙종은 경주의 향리에 있는 사당에 숭열사
우(崇烈祠宇)라는 사액을 하사하고 다시 대보단(大報壇)에 배향 하는 광영을 내렸으니 후손들의 명예는 말할 것도 없지마는 온고을의 자랑이라고 않을 수 없다. 숭열사우는 경주의 사림(士林)의
요망으로 용산서원(龍山書院)이 되어 지금도 찾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