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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주시 관광자원 영상이미지

수중릉(대왕암)으로 가는 길

| 2005.01.28 | 조회 4369
수중릉(대왕암)으로 가는 길

경주시내에서 문무대왕 수중릉(일명 대왕암)으로 가는 길은 두 군데가 있다. 첫째, 보문단지를 지나 덕동호를 넘어 추령터널로 가는 길이 있고, 두번째는 경주시내에서 울산 국도로 가다가 불국사로 접어들어 석굴암길로 올라가는 중턱 즈음에서 오른쪽으로 향하면 장항리로 넘어가는 길도 있다. 그러나, 그 옛날 신라시대에는 이 두 길을 사용하지 않았으리라 상상해 본다. 경주시내에 황룡사가 있지만, 덕동댐내 덕동교를 지나면 황룡동이 있고 이 동네의 산골짜기에도 신라시대 때도 있었는지 모를 황룡사란 절이 있다. 이 절을 지나 한티버든이란 재를 넘으면 도통골로 이어진다. 도통골의 바로 밑에는 부처님이 설법을 강연했던 곳인 기림정사의 이름을 딴 기림사란 절이 나온다. 신문왕이 감은사를 낙성하고 산의 신(神)인 김유신 장군과 바다의 신(神)인 문무대왕으로 부터 만파식적을 얻어 왕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점심을 먹었던 곳이 기림사의 서쪽 있었다는 기록으로 추정해보면, 아마도 이 길을 따라 경주시내에서 동해구에 있는 감은사, 문무왕의 수중릉인 대왕암에 이르렀을 것이다.

문무대왕(文武大王)

문무대왕은 해를 토해낸다는 토함산 자락에 위치한 석굴암과 달을 머금는다는 함월산 자락에 담겨있는 기림사의 계곡 물들이 합쳐져 대종천으로 흘러 나가는 동해구 봉길리 바다 속 큰바위에 묻혔다. 바다의 용이 된 것이다. 그가 바로 신라 30대 문무대왕이다.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문무대왕의 이야기에 앞서 상상의 타임머신을 그의 할아버지인 용춘(龍春)에게 멈추어 보자.

용춘은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632년) 당시 최초의 내성사신을 지냈다. 오늘날로 치면 청와대 비서실장과 행정부 국방부장관을 겸한 직책이었다. 그는 기미(오늘날로 치면 ‘낌새’)를 잘 아는 것이 귀신같았다는 정도로 뛰어난 사람이었다. 신라의 삼보중의 하나인 황룡사 9층 목탑도 그의 감독하에 만들었다. 제 27대 선덕여왕(善德王 재위 632~647년) 당시 용춘은 60세를 넘어 백제의 장인 아비지를 초청하여 신라 기술자 200명을 거느리고 오늘날 아파트 20층이나 넘는 9층 목탑을 완성하였다. 삼국 통일로 가는 구심점 역할을 한 것이다. 현대의 기술로도 3층 이상은 못 만든다는 뛰어난 목탑을 이룩하였던 토목․건축과 관련한 이름높은 인물이었다. 용춘의 아버지인 진지왕이 폐위하지만 않았으면 왕이 되었던 인물이었다. 이런 뛰어난 용춘은 아들 김춘추에게 진골로서는 최초의 왕이 되는 길을 닦는데 기초를 다졌던 분이다.

그럼 문무왕의 아버지인 김춘추는 누구인가. 키 180cm, 몸무게 75kg이면 요즘에도 패션모델 정도의 멋진 체격을 갖춘 외모와 아버지의 피를 받아 지략이 뛰어났다. 당나라의 태종도 그의 외모에 놀랐다는 기록도 있다. 일찍이 국제관계를 잘 처리한 외교적 수완을 가진 분이었다. 그래서 당 나라 황제의 마음을 움직였다. 처음부터 중국의 군사를 빌려주기를 청하지 않고 국학에 나아가 공자에게 제사 지내는 의식과 경전을 강론하는 것을 볼 수 있도록 청한 것이다. 외교술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아버지 용춘의 업적을 기반으로 삼아 외교능력을 발휘하여 나라의 안전을 지켜내었다. 그가 바로 진골로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오른 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재위 654~661년) 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인간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신라의 임금이 죽으면 신하들이 임금의 업적을 기리는 시호를 올렸다. 신라 29대 왕인 김춘추에게는 무열왕(武烈王)이라는 시호(諡號)가 올려졌다. 그의 업적이 위대하고 거룩하여서 묘지에 불리는 묘호(廟號)까지 올려졌던 신라에서는 유일한 왕이다. 661년 이를 태종(太宗)이라 했다. 당시 당나라의 왕의 호와 똑같은 것이다. 아직 고구려와의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으나 백제를 평정했다는 자주정신의 발로였다. 이 위대한 태종무열왕은 백제, 고구려를 물리치고 삼국 통일을 이루는 밑거름을 이루었다.

삼국통일 과정에 무열왕이 돌아가자 문무대왕이 뒤를 이었다. 문무대왕의 이름은 김법민(金法敏)으로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큰아들일 뿐만 아니라 김유신 장군의 둘째 여동생의 아들이다. 그러니까 김유신은 문무대왕의 외삼촌이 되는 셈이다. 그는 아버지와 외삼촌을 따라 백제정벌에 참여하였고 태종무열왕이 죽자 661년 신라 제 30대 왕으로 즉위하여 21년간 통치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왕위에 올라 668년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평정하고 이후 한반도에서 당을 물리치기 위해 8년간 수십 차례의 전투에서 반드시 필승을 이끌어 비로소 676년에는 대동강과 원산만을 잇는 남쪽의 영토를 장악하여 삼국을 통일을 이룬 것이다. 한반도 남쪽 조그만한 지방에서 시작한 신라를 한반도의 최초 통일 국가로 이룬 문무대왕이다. 문무(文武)라는 시호를 보면 문예도 탁월하고 무예도 뛰어났던 어느 한 곳에도 치우침이 없는 완벽한 왕이었던 것 같다. 삼국을 통일하기 위해 15년 이상 무수히 많은 전쟁을 치렀으며, 그 어려웠던 통일과정을 문무대왕 자신이 모두 체험하였다. 그는 당나라의 대명궁(大明宮)과 백제의 궁남지(宮南池)를 보고서 안압지(雁鴨池)[실제로는 월지(月池) 혹은 임해전지(臨海展池) 임]를 679년 재위 19년에 완성하였다. 외국의 사신을 접대하거나 나라의 경사스런 일이 있을 때 신하와 함께 이곳에서 향연을 즐겼다. 또한, 문무대왕은 통일 이후 다시는 꺼내 쓸 수 없도록 병기와 투기를 산 속에 묻었다. 전쟁을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에서 나온 먼 행차가 바로 덕동댐의 물을 이루는 근원지인 깊고 깊은 산 속에 무장사를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서쪽의 호국사찰 사천왕사(四天王寺)와 동쪽의 호국사찰 진국사(鎭國寺)도 지었다. 이 진국사를 짓는 와중에 681년 7월 1일 숨을 거둔다. 이것도 모자라서 죽어서도 동해의 호국용(護國龍)이 되기를 자처하였다. 불교를 신봉했던 국왕으로서 죽은 후에 하늘 세계나 극락으로 갈 것을 바라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삼악도(三惡道)의 하나인 동물인 용(龍)으로 태어나기를 스스로 원하여서 국가를 수호하겠다는 것이었다

그의 할아버지(龍春) 이름에 나오는 용처럼 동해의 용이 되기 전 그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유언을 재삼 쓸려고 하니 콧날이 시끈해진다. 마지막 유언은 이렇게 펼쳐진다.

“서쪽을 정벌하고 북쪽을 쳐서 강토를 평정하였다. 백성들의 아비와 아들의 오랜 원한을 갚았다. 살아남은 사람과 죽은 사람에게 널리 상을 주고, 병기를 녹여 농구를 만들어 백성들이 태평세월을 누리게 하였다. 이를 보고서 정치와 교화를 애쓰다가 다시 깊은 고질(痼疾)에 걸렸다. 명운(命運)은 가더라도 이름이 남는 것은 고금에 한결같은 법칙이니 죽은 들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태자는 곧 내 관 앞에서 왕위를 잇도록 하라.

중국의 오왕(吳王)의 북산 무덤에서 금향로의 광채를 볼 수 있으며, 위주(魏州)의 서릉(西陵)을 바라봄도 세월이 흐르면 동작대(銅雀臺)의 이름만 듣게 되는 것이다. 한 때를 풍미하던 영주도 마침내 한 무더기 흙무덤이 되어 나무꾼과 목동들은 그 위에서 노래를 부르며, 여우와 토끼들은 그 곁에 구명을 뚫고 사니, 한갓 재물만 허비하고 후일 사람만을 고되게 하고 죽은 사람의 넋을 구제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들은 나의 즐겨하는 바가 아니다.

임종(臨終) 한 후 열흘이 되면 곧 고문 바깥뜰에서 서역(西域)의 의식에 따라 화장하라. 상복의 경중은 스스로 정해진 법이 있거니와 상례의 제도는 힘써 검소하고 절약함을 쫓을 일이다. 변방의 성읍(城邑)을 지키는 일과 주(州)와 현(縣)에 세를 부과하는 일에서 요긴한 것이 아니면 모두 마땅히 요량하여 없을 것이며, 율령(律令)과 격식(格式)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곧 고치고 원근에 포고하여 이 뜻을 알게 할 것이며 주관하는 이는 이를 시행하라“ 했다. 문무대왕은 스스로 죽어서 삼악도인 용이 되기를 지의법사에게 전하였다. 문무대왕은 본인의 시신을 불태워 동해의 큰 바위(大王岩)에 안치되었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죽어서 바다에 묻히고자 했던 왕은 없었다. 바다의 용으로 변신 한 것이다.

잠시 현실에도 없는 상상의 타임머신을 타고 이제 현대로 돌아왔다. 길라잡이 너울 선생의 설명처럼 인간(人間)의 사이에는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이 존재한다. 즉, 인간(人間), 시간(時間), 공간(空間)인 삼간(三間)속에서 인류의 역사는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공간(空間)은 현재와 과거를 잇는 유일한 도구인 셈이다.

지금 나는 감은사의 금당터 앞에 서서 잠시 호흡을 멈추었다. 시간(時間)의 세월은 흘러갔다. 그러나, 용이 된 문무왕은 비록 물은 없고 금당 건물은 사라 졌지만 지금도 공간(空間)사이에서 과거와 현재를, 감은사 금당터 밑과 수중릉인 대왕암 이곳과 저곳을, 넘나들고 있는 것이다. 1,200여전의 실체가 현재에도 살아 쉼 쉬면서 과거와 현재를 잇는 공간(空間) 속에 문무왕은 염연히 살아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감은사 금당터앞 마을의 지명도 용당리(龍堂里)라 불린다. 또한, 이 동네에 살아온 사람들 중 용(龍)자가 들어가는 이름을 가진 분들이 많다고 한다. 그렇다. 문무왕은 돌아 간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 과거에서 현재와 미래로 영원히 살아 지속되는 것이다.

살아 있는 문무대왕을 친견(親見)하면 사뭇 숙연해질 것 같다. 위엄과 문무를 겸비하였던 왕.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그의 호국 정신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후세들의 마음에도 울려 퍼져 영원한 메아리가 되길 바란다. 2002년도 월드컵의 4강 신화를 만들었던 태극전사의 투지처럼, 세계 만방에 대한민국 국민의 한마음이 된 저력을 보여줬던 붉은 악마의 함성처럼, 메아리 치길 바란다. 영원히 ! 영원히 ! 영원히 !

대한민국 ! 짝 자아~짝 짝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