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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

출처 : 경주시 관광자원 영상이미지

간밤에 떨어진 별이 오늘 밤 다시 오르고

| 2005.01.28 | 조회 2770
명활산

경주 평야 바로 동쪽 산이 명활산(明活山)이다. 곧 보문 단지의 보문못 남쪽 산이다. 259m의 산 서쪽에 보문사(普門寺) 절 터가 있는 남촌(南村)마을이 있고, 산 북쪽으로 난 경감로(慶甘路) 옆에 숲머리 마을이 있다. 보문교를 왼편으로 비껴 두고, 오른쪽으로 난 도로를 따라가는 산이 명활산이다.

산 중턱에 돌을 쌓아 만든 성 터가 남아 있으니, 신라 초기부터 『삼국사기』에 나오는 명활성(明活城)이다.

'실성니사금(實聖尼師今) 4년(405) 왜병(倭兵)이 명활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는데, 왕이 기병을 거느리고 쳐부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명활성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이 때의 명활성은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며, 늦게 잡아도 지금으로부터 1600여 년 전에 명활성이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 16년(473)에는 성을 수리하고, 2년 뒤에 왕이 거처를 옮겨 지내다가 돌아가시고,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10년(488)에 월성(月城)으로 이사하기까지 13년간 궁성으로 이용되었다.

자비왕이 명활성으로 궁성을 옮긴 까닭은 고구려의 장수왕이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남하정책을 계속하여 신라와 백제에 압력을 가하였기 때문이며, 백제의 개로왕(蓋鹵王)이 한성(漢城)을 빼앗기고 자신은 죽음을 당하는 처절한 운명을 겪게되는 급박한 국제 정세가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던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명활성에 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더 남기고 있다.
'진흥왕 15년(554) 가을 7월에 명활성을 수축하였다.'
'진평왕 15년(593) 가을 7월에 명활성을 고쳐 쌓았는데 둘레가 3천보(步)다.'

27대 선덕여왕 16년(647)에는 상대등 비담(毗曇)과 염종(廉宗) 등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근거지가 명활성이었다.

왕은 김유신 장군 등의 활약에 기대를 걸었지만, 처음에는 반란군의 기세가 등등하여, 여러 차례 공방전이 거듭되면서도 양편이 팽팽히 맞서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별똥별[流星]이 하늘에서 서쪽으로 떨어졌다. 명활성에서 이것을 본 반란군들이
"별은 하늘의 뜻인데, 별이 서쪽 월성으로 떨어졌으니 이는 여왕이 망할 징조다."
하고 사기가 치솟은 반면, 백성들과 왕의 군사들은 미심쩍게 여겼다. 때는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정월이었다.

이튿날 저녁 김유신 장군은 커다란 연을 만들어 불을 붙여 하늘로 띄워 날리고는 소문을 퍼뜨렸다.
“어제 밤에 떨어졌던 별이 오늘 밤 도로 올라갔다.!”

왕의 군사는 사기가 충천했고 반란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다음 날 싸움에서 반란군이 항복하였으므로 난리는 평정되었다.

이 때 명활성이 크게 파손되었을 것이며, 이 사건이 있은 이후로는 명활성에 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통일 신라 때는 성곽으로 거의 이용하지 않은 것 같다.
이 성에 관하여 몇 십 년 전까지는 석성(石城)뿐인 줄 알았다가 여러 번 답사를 해본 결과 토성 자리도 확인하였는데, 석성이 4km, 토성이 5km가 넘는다.

1988년 여름에 북쪽 성벽에서 석성을 처음 쌓을 때 기록인 명활산성작성비(明活山城作城碑)가 발견되어 지금 국립경주박물관 본관 2층에 전시되고 있다. 높이 67cm 크기의 직6면체 화강석에 148 글자가 옴폭 새김[陰刻] 되어 있다.

글의 내용은 성벽을 쌓는데 동원된 지역의 최고 책임자와 그 밑의 실무 책임자 이름, 담당한 성벽의 길이, 공사 날짜, 글쓴 사람 이름 등이며, 제작 년대는 진흥왕 12년(551)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성 쌓은 연대(554년)와는 3년의 차이가 있는데, 진흥왕 때의 금석문(金石文) 연구와 사회상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천군동 절 터에서 본 명활산

호수를 끼고 낸 꼬불꼬불한 길을 지나면, 북쪽에는 ‘경주월드’라는 놀이터가 있고 남쪽 들판에는 석탑이 둘 서 있다. 마을 이름이 천군(千軍)인지라 ‘천군동 3층 쌍석탑’이라 부른다. 보물 제168호로 지정되어 있다.

보문저수지는 6. 25 사변이 끝난 후, 1950년대 중반 U.N 운크라에서 지원하는 양곡을 근로의 댓가로 배급하면서 만든 '수리조합 저수'지였다. 못 막기 전에는 모래 자갈이 깔려 있는 황무지였는데, 그 때는 염소나 소를 먹이던 곳이라 「양골」또는 「양장(羊場)」이라 불렀다.


이곳의 이름이 천군 마을이고, 그 북쪽은 북군(北軍) 마을이니, 이 부근은 군(軍)과 깊은 관계가 있는 곳이라 짐작되어 『삼국사기』를 뒤적여 보았다.

신라 나해왕(奈解王; 10대) 5년(200) 9월에 알천의 위쪽[閼川之上]에서 왕이 몸소 군대를 검열하는 '대열(大閱)'을 하였다는 기록부터 후기인 애장왕 5년(804)에도 알천 위쪽에서 대열하였다는 기록까지, 여러번 군대 열병과 관계되는 기록이 보인다.

알천은 지금도 조선시대 ‘알천 개수비’가 있는 보문 숲머리 앞 동천 상류이니, 그 위쪽 보문 거랑을 거슬러 올라가 군대를 열병할 만한 장소는 바로 지금 보문못의 바닥과 그 언저리다.


천군동에 있던 절은 필시 명활성이나 천군, 북군에 있던 군사들의 기도처나 발원 사찰이었으리라.

이런 예는 만리성(萬里城)이라 부르는 모화(毛火)에 있는 관문성(關門城) 부근의 원원사(遠願寺)가 대표적이다. 곧 김유신, 김술종 장군 등이 호국불교 신인종의 안혜 대덕 등과 함께 왜적을 막으려는 발원으로 지은 절이었다.

명활성은 지금의 양남, 양북, 감포 쪽 동해안으로 침범해 들어오는 왜구를 막는 중요한 군사 요충지였고, 천군과 북군 마을은 서라벌을 지키는 정예 군사의 훈련장이었거나 주둔지였을 것이다. 그러니 임금이 몸소 시행하는 대열(大閱)을 여기서 행한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