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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주시 관광자원 영상이미지

경주남산 慶州南山

| 2005.01.28 | 조회 6214
경상북도 경주시(慶州市) 남쪽에 남북으로 솟아 있는 산. 고위산(高位山, 494m)과 금오산(金鰲山, 468m) 등 2개의 봉우리가 남산을 대표하는데, 이 중 금오산은 남산을 통칭하는 이름으로도 사용된다. 남북길이 8㎞, 동서길이 12㎞, 34곳의 계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완만한 동남산과 골이 깊고 가파른 서남산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남산의 동쪽에는 낭산(狼山)·명활산(明活山), 서쪽에는 선도산(仙桃山)·벽도산(碧桃山)·옥녀봉(玉女峰), 북쪽에는 금강산(金剛山)·금학산(金鶴山)이 솟아 있으며 토함산(吐含山) 줄기가 동해를 막는 성벽 구실을 하고 있어 남산은 서라벌을 지키는 요새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남산에서는 BC 10∼BC 6세기 무렵의 유물로 추정되는 민무늬토기·간돌도끼[磨製石斧(마제석부)]·간돌칼[磨製石刀(마제석도)]·홈자귀[有溝石斧(유구석부)]·방적차(紡績車)와 함께 고인돌 등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남산은 또한 신라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탄생설화가 있는 나정(蘿井), 신라최초의 궁궐터인 창림사(昌林寺), 신라가 종말을 맞았던 포석정(鮑石亭)이 있던 곳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신라 개국 이래 줄곧 신라인과 호흡을 같이하며 신성시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남산은 신라시대의 불교유적지로서도 이름이 나 있다. 불교가 신라에 전파되면서 숭산신앙(崇山信仰)·암석신앙과 연관된 불교문화는 남산에 집중, 표현되었다. 지금까지 발굴된 유물·유적은 절터 112군데(암자터 포함), 석불 80체, 석탑 61기, 석등 22기 등이다. 금오산·고위산·도당산(都堂山)·양산(楊山) 일대 즉 경주시 인왕동(仁旺洞)을 비롯한 4개 동과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內南面) 용장리(茸長里) 등 1813만 4635m²의 지역이 1985년 사적 제311호 <경주남산일원>으로 지정되었다.

왕정골[王井谷(왕정곡)]
반월성(半月城) 앞 골짜기로 대궐에서 사용하던 우물이 남아 있어 왕정골이라고 불린다. 인용사(仁容寺)터·천관사(天管寺)터 등 3군데의 절터와 석조여래입상 1체, 석탑 5개, 불상대좌 2개, 정자터 3군데가 발견되었다. 문무왕의 아우 김인문(金仁問)의 안녕을 빌기 위하여 신라사람들이 지었다는 인용사 터에는 2기의 탑 잔재와 팔방대좌(八方臺座)의 지대석(址臺石)이 남아 있다. 도당산 서쪽 기슭에 있던 천관사 터에는 탑재(塔材)·주춧돌이 널려 있다. 높이 2m, 나비 1m인 여래입상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이 밖에 최치원(崔致遠)이 신라의 국운이 다한 것을 알고 고려 왕건(王建)에게 글을 올린 곳인 상서장(上書莊)이 있다.

절골[寺谷(사곡)]
상서장 동쪽 양지(陽地)마을의 뒤쪽 골짜기로, 절터의 흔적으로는 3층석탑의 탑재가 남아 있다.

부처골[佛谷(불곡)]
남산 동쪽 기슭 인왕리에 있는 계곡으로 3군데의 절터, 석불 1체, 마애불 1체 등이 발견되었다. 보물 제198호로 지정된 경주남산불곡석불좌상은 높이 3.2m, 나비 4.5m의 바위에 1m 깊이로 판 감실(龕室) 안에 안치되어 있는데, 남산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으로 전해진다.

탑골[塔谷(탑곡)]
부처골과 미륵골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절터 2군데와 석불 1체, 마애불 22체, 석탑 4기, 석등 2기가 발견되었다. 탑골 입구에는 거대한 바위의 4면에 부처·보살·신장상(神將像)·동물·탑·비천(飛天)·수목 등을 새긴 보물 제201호 경주남산탑곡마애조상군이 있다.

미륵골[彌勒谷(미륵곡)]
배반동(排盤洞) 경주임업시험장 뒤쪽 골짜기로 보리사(菩提寺)와 석불 1체, 마애불 1체, 석탑 2기가 있다. 보리사 경내에 보물 제136호인 경주남산미륵곡석불좌상이 있으며 절 입구에서 동쪽 300m 되는 곳에 마애여래좌상이 있다. 이는 높이 0.9m의 좌불로 전체높이 1.5m의 광배형 감실에 안치되어 있다.

천암골[千巖谷(천암곡)]
화랑교육원의 북서쪽에 있는골짜기로 1군데의 절터와 헌강왕릉(憲康王陵)이 있다. 사적 제187호 왕릉은 4각으로 다듬은 돌로 둘레돌[護石(호석)]을 쌓았으나 덮개돌[上石(상석)]·난간 등이 전대의 왕릉에 비하여 빈약하다.

철와골[鐵瓦谷(철와곡)]
통일전(統一殿)의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다른 곳에 비하여 골이 깊고 넓다. 2군데의 절터와 석탑 2기, 정강왕릉(定康王陵) 등이 있으며 1959년 이곳에서 발견된 불두(佛頭)가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불두의 높이가 1.53m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불상 전체높이는 10m가 넘었으리라 추정된다. 이 밖에도 《삼국유사》 중 <거문고갑을 쏘라>는 전설을 가진 사적 제138호 서출지(書出池)가 있다.

국사골[國師谷(국사곡)]
탑마을과 서출지가 있는 안마을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4군데의 절터와 석탑 4기, 석등 2기, 대좌 2기 등이 발견되었다. 절터에서는 축대·기단면석·갑석과 탑의 뚜껑돌 등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 밖에 상사바위[想思巖(상사암)]·고갈바위·큰지바위·부석(浮石;버선바위) 등의 기암이 모여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오산골[鰲山谷(어산곡)]
남산동 남쪽마을에 있는 골짜기로 개선사(開善寺)터와 마애불 1체가 발견되었으며 골짜기 아래에는 몇 기의 고인돌이 있다. 개선사터에 있는 높이 1.7m, 나비 0.56m의 약사여래상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대지암골[大地巖谷(대지암곡)]
남산동 탑마을을 지나는 골짜기로 탑마을에서는 4군데의 절터와 보물 제124호인 남산리삼층석탑 2기가 발견되었다. 양피사(讓避寺)의 것이라는 설과, 피리사(避里寺;뒤에 食佛寺)의 것이라는 설이 전해온다.

쑥두듬골[蓬丘谷(봉구곡)]
남산동 남쪽마을의 남쪽을 흐르는 골짜기로 절터와 석탑 2기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 중 동탑(東塔)은 불국사역 앞 로터리에 옮겨져 있다.

승소골[僧燒谷(승요곡)]
남산동 계곡 중 마지막 지류가 있는 골짜기로 1군데의 절터와 석등 2기가 발견되었다. 높이 3.6m의 삼층석탑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천동골[千洞谷(천동곡)]
승소골과 봉화골 사이의 골짜기로 2군데의 절터와 석등 1기, 돌기둥[石柱(석주)] 2개가 발견되었다. 높이 2m, 나비 0.6m의 돌기둥에는 100개 가량의 감실을 파고 불상을 안치했던 흔적이 있다.

봉화골[烽火谷(봉화곡)]
동남산에서 가장 깊은 골짜기로 2군데의 절터, 마애불 8체, 석탑 2기, 석등 4기, 비석대 1기, 경석(經石) 1개 등이 발견되었다. 보물 제200호인 경주남산칠불암마애석불은 큰 바위에 삼존불과 사방불 등 7개의 불상이 조각되어 있다. 칠불암 뒤에 높이 솟은 바위에는 보물 제199호인 높이 1.9m, 나비 1.3m의 경주남산신선암마애보살반가상이 있다.

식혜골[識慧谷(식혜곡)]
동남산의 왕정골과 가장 가까운 골짜기로 사제사(四祭寺)를 비롯한 2군데의 절터, 남산성과 포비암(布飛巖) 등이 있다. 사제사터에서 발견된 팔부신중을 새긴 기단면석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사적 제22호인 남산성은 진덕여왕 때 쌓은 것을 문무왕 때 보수한 것으로 둘레가 4㎞에 이르며, 포비암은 식혜골 정상에 있던 바위로 베짜던 곳이라 하여 베나리바위라고도 한다.

장창골[長倉谷(장창곡)]
식혜골에서 500m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7군데의 절터와 석불 4체, 석탑 4기, 석등 2기, 당간지주 1개 등이 발견되었다. 그 중 삼화령석조미륵삼존불상(三花嶺石造彌勒三尊佛像)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있고 천은사(天恩寺)터에는 초석, 탑의 뚜껑돌 등이 남아 있다. 또 식량저장소였던 장창과 사적 제173호인 일성왕릉(逸聖王陵)이 있다. 남간사(南澗寺)터 부근에는 신라 초기 6촌(村)의 하나인 양산대(楊山臺)가 있으며, 박혁거세의 탄생설화가 관련된 사적 제245호 나정(羅井)도 이 골짜기에 있다.

포석골[鮑石谷(포석곡)]
탑정동(塔井洞) 포석마을 뒤쪽에 있는 골짜기로 원래 부흥골[富興谷(부흥곡)]이었으나 포석정의 이름을 빌어 포석골이 되었다. 10군데의 절터와 석불 2체, 마애불 1체, 석탑 8기, 석등 1기 등이 발견되었다. 연꽃 위에 앉아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고 있는 높이 1m의 마애여래상 외에도 사리탑·남근석(男根石)·상사바위가 있다. 대표적인 절터로는 창림사지가 있으며 목 없는 비로자나불상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유느리골[潤乙谷(윤을곡)]
포석골의 상류로 해목령(蟹目嶺) 남쪽에서 남산성 남쪽 성벽 아래로 흐르는 계곡이다. 2군데의 절터와 마애불 3체, 석탑 1기, 석등 1기가 발견되었다. 0.8m의 약사여래삼존불은 ㄱ자형의 암벽에 새겨져 있다.

기암골[碁巖谷(기암곡)]
포석골의 한 갈래로 배실이라고도 한다. 3군데의 절터와 석불 1체, 석탑 4기, 석등 1기가 발견되었다. 머리 없는 여래좌상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있으며 산봉우리의 바둑바위 부근에 금송정(琴松亭)터가 있다.

선방골[禪房谷(선방곡)]
포석정의 500m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2군데의 절터와 석불 4체, 석탑 2기가 발견되었다. 보물 제63호인 배리석불입상은 배동삼체석불이라고도 하며 조각솜씨가 석굴암과 견줄 만하다. 주위에는 삼불사(三佛寺)·망월사(望月寺)가 있다.

삼릉골[三陵谷(삼릉곡)]
배동(排洞) 배리마을 뒤쪽의 골짜기로 냉골[冷谷(냉곡)]이라고도 한다. 8군데의 절터와 석탑 1기, 석등 1기가 발견되었으며, 사적 제219호인 아달라왕릉(阿達羅王陵)·신덕왕릉(神德王陵)·경명왕릉(景明王陵) 외에 경애왕릉(景哀王陵) 등 4개의 능이 있다. 그 밖에도 목 없는 석불좌상, 삼릉계선각불상군으로 불리는 6존불상,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9호인 마애관세음보살상, 제158호인 마애선각여래좌상, 제159호인 마애석가여래좌상, 보물 제666호로 지정된 경주삼릉계석불좌상 등, 석불 3체와 마애불 11체가 있다.

삿갓골[笠谷(입곡)]
삼릉골의 지류로 경애왕릉 뒤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3군데의 절터와,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94호로 지정된 경주남산입곡석불두가 있다. 통일신라시대 중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불상은 상반신만 남아 있으나, 세련된 조각수법을 보여준다.

약수골[藥水谷(약수곡)]
배동 뒷비파마을 뒤쪽의 골짜기로 산호골[珊瑚谷(산호곡)]이라고도 한다. 6군데의 절터와 여래좌상 1체, 마애여래대불 1체, 석탑 1기가 발견되었다. 여래좌상은 머리부분이 손실된 채 결가부좌를 하고 있으며, 마애불은 높이 10m로, 남산의 마애불 중 가장 크다. 박혁거세 6세손인 지마왕(祗摩王)의 능으로, 사적 제221호인 지마왕릉도 있다.

비파골[琵琶谷(비파곡)]
배동 앞비파마을 뒤쪽의 골짜기로, 석가사(釋迦寺)·불무사(佛無寺) 등 4군데의 절터와 4기의 석탑터, 석등 1기가 발견되었다. 절의 창건연대는 692년으로 전해진다.

용장골[茸長谷(용장곡)]
금오산과 고위산 사이의 계곡으로, 용장사를 비롯한 11군데의 절터와 석불 5체, 마애불 1체, 석탑 6기, 석등 1기 등이 발견되었다. 삼층석탑과 석불좌상은 각각 보물 제186호와 제18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불두와 약사여래좌상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보물 제913호로 지정된 용장사지마애여래좌상은 높이 1.62m, 나비 1.1m로, 삼층석탑 아래의 높이 10m 암벽에 새겨져 있다. 이 밖에도 용장골에서는 대좌 1기와, 비를 세웠던 귀부(龜趺) 1기 등이 발견되었다. 용장사는 김시습(金時習)이 기거하면서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쓴 곳이다.

천룡골[天龍谷(천룡곡)]
남산 최남단에 있는 골짜기로, 천룡사터를 비롯한 3군데의 절터와 석탑 1기, 석등 1기 외에도 주춧돌·귀부·법당터·석조(石槽)·부도·대좌 등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천룡사는 원래 수리사(水利寺)였으나, 1040년 최제안(崔齊顔)이 중건하면서 천룡사라 불렀다. 조선시대에 폐사(廢寺)되었다.

<냉골 등산코스>

경주 남산(南山)은 이름 그대로 경주 남쪽에 솟아 있는 산으로, 금오산(471m), 고위산(494.6m), 도당산, 양산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신라의 건국설화와 관련된 나정(蘿井), 신라왕실의 연회장인 포석정(鮑石亭), 김시습이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지은 용장사(茸長寺)터 같은 유적들을 비롯해 신라인들의 불심과 예술성을 엿볼 수 있는 불교유물들이 수없이 많은 산이다.
동서 4km, 남북 8km의 산 안에 불상 80여 개, 탑 60여 기가 들어서 있어 산 자체가 하나의 박물관을 이룬다. 게다가 복잡한 능선과 골짜기들은 밖에서 보기와는 달리 심산유곡의 미도 지니고 있어 유적과 석불 답사를 겸한 산행코스로 권장할만하다.

남산의 유적은 어느 한 곳이 아닌, 골짜기와 산등성이 곳곳에 널려 있는 까닭에 며칠 두고도 속속들이 들여다보기는 어렵다. 하루 산행코스라면 불상의 계곡인 냉골을 타고 금오산 정상에 오른 다음 전망대를 거쳐 신라 정원의 대표의 포석정으로 내려오는 코스를 권하고 싶다. 신라 불교의 황금기와 신라 패망 직전의 분위기를 더듬어볼 수 있는 코스다.

냉골은 포석정 입구에서 남쪽으로 2km쯤 떨어져 있다. 냉골을 들어서면 우선 아름드리 노송들이 군무를 추는 듯한 분위기의 송림숲이 인상적이다. 송림에서 신라 제54대 경명왕과 53대 신덕왕, 그리고 8대 왕인 아달라왕의 묘가 나란히 있는 삼릉을 지나면 계곡으로 들어서게 된다.
훼손된 불상에서 수난의 역사를 읽는다. 중간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뉘는데, 오른쪽 길은 등산로, 왼쪽길은 선각여래좌상, 선각마애불, 석조여래좌상, 마애석가여래좌상 등 석불이 연이지는 탐방로로, 골짜기 중간에서 다시 만난다. 화려한 연화대석 위에 올라앉은 석조여래좌상을 지나면 산길이 가팔라지고 암벽이 골 양옆에 솟구쳐 있는 등, 제법 험난한 분위기다.
그러다 상선암(上禪庵)에 이르면 냉골 전체가 한눈에 펼쳐진다. 상선암을 위 능선에 오르기 직전에는 마애석가여래좌상(磨厓釋迦如來坐像)이 나온다. 도톰한 두 뺨에 입가에 조용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좌불로 남산에서 가장 큰 불상이다. 마애석가여래좌상을 지나 가파른 산사면을 타고 5분쯤 오르면 금오산 북릉이다. 이곳에서 오른쪽 20분 거리에 금오산 정상이 있다.
정상으로 향하다 첫번째 만나는 바위는 '상사병에 걸린 사람이 이곳에서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깃든 상사바위다. 동쪽에서는 궁전, 서쪽에서는 탑 같이 보인다고 한다. 이 바위 동쪽에는 감실이 파여 있는데, 그 안에는 남산의 불상 중 가장 작은 불상이 있다. 상사바위 이전까지는 제법 험난하지만, 상사바위를 지나면 사색적인 분위기의 송림숲길이다. 헬기장이 닦여 있는 금오산 정상은 사방으로 잡목이 들어서 있어 전망이 좋은 곳은 아니지만, 터가 넓어 중식 장소로 널리 이용된다.
금오산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로 가려면 정상에서 남동쪽 산길로 내려서다 남산순환도로에서 북쪽 방향으로 20분쯤 가야 한다. 도로 왼쪽 지릉에 위치한 전망대는 금오산 북사면과 경주시가지가 한눈에 바라 뵈는 곳이다. 이곳에서 순환도로를 따라 포석정으로 갈 수 있지만, 기왕이면 소석불과 마애여래좌상을 보면서 한적한 산행을 즐길 수 있는 부흥골을 따르라고 권하고 싶다.